저출산 고령화는 우리나라만의 고민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심각한 인구 감소, 인구 소멸 위기에 처한 마을이 많다. 그중 하나가 일본의 대표적 폭설 지대인 니가타현이다. 한겨울엔 눈이 2∼3m씩 쌓이고, 고된 농사일까지 겹쳐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두메산골. 그런데 요즘 이곳이 일본의 30대가 가장 좋아하는 세련된 원풍경으로 각광받고 있다. 20년 전부터 산과 호수, 들판, 논두렁에서 시작된 ‘에치고쓰마리 대지(大地) 예술제’는 한적한 농촌을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
● 설국의 대지 예술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雪國)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1968년 일본 최초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첫 구절이다. ‘국경의 긴 터널’에서 ‘국경’이란 일반적으로 나라 간의 경계를 뜻하지만, 일본에서는 지역 간의 경계란 의미로도 쓴다. 설국의 배경은 바로 니가타현이다.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1시간 20분. 산맥의 긴 터널을 지나면 니가타현에 도착한다. 우리나라 동해안과 마주 보고 있는 니가타현은 동해를 건너온 습한 구름이 반대편의 높은 에치고(越後)산맥에 막혀 엄청난 양의 폭설을 토해 내는 곳이다.
그런데 한여름에 찾아간 니가타현에는 또 다른 ‘국경의 터널’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도카마치시 기요쓰(清津峡) 협곡에 있는 ‘빛의 터널(Tunnel of Light)’. 750m 어두운 터널을 30분 걸어가자 V자 협곡이 나타났다. 주상절리 바위 사이로 급류가 흐르는 터널의 밑바닥이 반짝거렸다. 터널 끝 전망대인 ‘파노라마 스테이션’ 바닥에 있는 얕은 물웅덩이에 협곡의 경치와 사람들이 데칼코마니처럼 반사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V자 협곡 인생샷이 펼쳐졌다’라고 해야 할까. 1996년 만들어진 기요쓰 협곡의 터널은 2000년대 ‘에치고쓰마리 대지 예술제’의 작품으로 재탄생해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니가타의 명소로 떠올랐다.
니가타현은 예부터 ‘흰 눈, 흰 쌀, 투명한 사케’로 유명한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렸다. 일본의 명품 쌀 고시히카리가 바로 니가타현의 특산품이다. 쌀맛이 좋다 보니 구보타(久保田), 고시노간바이(越乃寒梅), 핫카이산(八海山) 등 일본 3대 전통주가 모두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고, 100여 개의 양조장이 있다.
명품 쌀은 산속 계단식 논에서도 재배된다. 도카마치에 있는 ‘호시토게의 계단식 논(星峠の棚田)’엔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논이 경사면에 펼쳐져 있다. 산속 눈 녹은 물을 먹고 자라는 니가타 쌀은 진주처럼 뽀얀 빛깔과 깊은 풍미로 유명하다. 계단식 논에는 봄에 물이 가득 차 있을 때 새벽의 운해를 찍으러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산골 힘든 농사일은 젊은이들을 도시로 떠나게 했다. 마을엔 노인만 남았고, 인구 감소로 폐교가 늘어났다. 2000년에 에치고쓰마리 지역(760㎢) 6개 소도시가 쇠락해 가는 마을 되살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임스 터렐, 구사마 야요이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참여하는 에치고쓰마리 대지 예술제였다. 논두렁, 호숫가 등에 전시된 현대 미술을 보기 위해 1회 때는 16만3000명이 몰려들었고, 6회째인 2015년에는 50만 명을 넘었다. 1회 때 예산은 3억8000만 엔. 그러나 경제 효과는 128억 엔이나 됐다. 이후 매년 2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3년에 한 번씩 트리엔날레가 열리는 행사가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올해는 지난달 13일부터 11월 10일까지 총 87일 동안 대지 예술제가 열리고 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과 함께 찾아가 본 산골마을 전시장이 20, 30대 젊은 관람객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 중심에는 폐교를 활용한 미술관이 있다. 도카마치(十日町)에 있는 ‘그림책과 나무열매 미술관’은 2005년 폐교할 때까지 다녔던 3명의 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 ‘학교는 결코 문을 닫지 않는다’가 설치돼 있다. 다시마 세이조 작가는 이즈반도 해변과 동해에서 수집한 유목과 나무열매 등에 물감을 칠해 학생과 선생님, 요괴와 귀신까지 유머러스하게 재현해 놨다.
마쓰노야마(松之山) 지역의 폐교인 구 히가시카와(東川) 초등학교에는 프랑스 작가의 작품 ‘마지막 교실(The last Classroom)’이 있다. 심장 고동소리가 들리는 어두운 복도를 걷다보면 으스스한 기분이 들지만, 관객들은 색다른 공간에서 짜릿한 체험을 즐긴다.
마쓰다이에 있는 ‘노부타이’는 네덜란드 건축가 그룹 MVRDV가 설계한 ‘설국농경문화(雪國農耕文化) 센터’. 2km의 산자락에 40점가량의 작품이 산재해 있는 필드뮤지엄이다. 이곳에는 구사마 야요이의 ‘꽃피는 쓰마리’가 관람객을 모으고 있고, 계단식 논에 농부들이 계절별로 모내기, 김매기, 수확을 하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은 대지예술제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속에 있는 거울이 프리즘 역할을 하면서 천장에 무지개가 떠오르는 작품도 있다.
‘에치고쓰마리 사토야마 현대미술관(MonET)’은 중앙의 수영장 물이 건물을 완벽히 반영하고 있는 구조로, 입구에 투명한 물풍선 작품이 하늘빛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도카마치의 얕은 언덕에는 ‘미인림(美人林·비진바야시)’이 있다. 수령 약 100년 된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숲이 아름다워 연간 10만 명이 찾는 곳이다. 이곳은 1920년대 목탄을 만들기 위해 너도밤나무를 모두 벌채해 민둥산이 됐는데, 연못가에 자연적으로 다시 복원된 숲이다. 줄기 굵기가 가지런하고, 늘씬한 너도밤나무숲은 자연과 마을 재생의 상징이다.
대지예술제는 곳곳에서 숙박 체험도 할 수 있다. ‘류곤(Ryugon)’은 에도시대 전통 민가(古民家)를 온천 료칸으로 개조한 곳. 온천뿐 아니라 ‘로맨틱 유키구니(Yukiguni·雪國)’라는 폭설지대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눈에 띈다. 로비에는 화롯불 앞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 있고, 벽에는 눈 올 때 쓰던 도롱이와 설피가 걸려 있다. ‘설국의 아침’ 조식에 나오는 하얀 눈사람을 형상화한 젓가락 받침대는 앙증맞기 그지없다. ● 구사쓰 온천 ‘유모미(물 마사지)’ 공연
니가타 옆 동네인 군마현의 구사쓰(草津) 온천은 기후현의 ‘게로(下呂) 온천’, 효고현의 ‘아리마(有馬) 온천’과 함께 일본 3대 명천으로 꼽히는 온천이다. 해발 1200여 m 고지대에 있는 구사쓰 온천에서는 분당 3만2300L 이상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하루에 드럼통 약 23만 개 분량의 온천수가 솟아나는 셈이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유황 냄새가 진동하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마을 한가운데 온천밭이라는 뜻의 ‘유바다케(湯畑)’ 온천이 샘솟고 있다. 강산성(PH 2.05) 온천으로 신경통, 피로 해소 등 온천 요법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원천수의 평균온도가 70도의 고온으로 찬물을 섞어 식히면 약효가 떨어지기 때문에, 에도 시대부터 자연적으로 온천수를 식히는 방법이 발달했다.
우선 마을 중심에는 긴 나무통으로 된 수로를 계단식 논처럼 만들어 놓았다. 온천수는 수로를 따라 층층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식혀진다. 각 온천에서도 온천욕하기 좋은 40도 내외로 식히기 위해, 배를 노로 젓듯 폭 30cm, 길이 180cm의 적송(赤松) 널빤지로 온천수를 저으며 식히는 ‘유모미(湯もみ·온천수 마사지)’를 한다. 유바다케 앞에 있는 ‘네쓰노유’에서도 50년 전부터 시작된 ‘초이나∼초이나∼’ 하는 노동요를 부르며 하는 유모미 공연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여성들이 하지만, 한 달에 2번은 J2리그에서 뛰고 있는 ‘자스파쿠사쓰(The Spa Kusatsu) 군마’ 팀 소속 선수들이 온천마을 축구팀을 홍보하기 위한 유모미 공연을 한다. 주민 사카타리에(坂田利恵) 씨는 “처음엔 시어머니와 함께 유모미 공연을 시작했었다”며 “23년 동안 공연을 해오신 마을 주민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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