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조선)에는 쌀이 남아도는데, 본토(일본)로 운반해오기 힘들죠? 조선인이 등에 쌀을 지고 헤엄쳐 오게 하면 어떨까요? 게으른 바퀴벌레들에게 좋은 약이죠.”
1945년 일본 오사카의 한 고급 음식점. 일본 정치인들이 조선 출신 사업가 한수(이민호) 앞에서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다. 한수가 일본 정치인들에게 상납의 대가를 요구하자 한수의 출신을 우회적으로 거론하며 악의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한수는 잠시 동요할 뿐 화내지 않는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 식사 자리를 지킨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한수에게 치욕은 살아남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냉혈한’으로 변신한 한수
애플TV 플러스 드라마 ‘파친코’ 시즌2가 23일 공개된다. ‘파친코’는 한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에서 정착한 재일한국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2022년 공개된 뒤 미국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TV 부문 최우수 외국어 드라마상을 받는 등 화제가 된 시즌1이 젊은 선자(김민하)의 시선에서 주로 진행됐다면, 시즌2 오프닝부터 한수를 앞세우며 서사를 펼친다.
특히 시즌2에서 주목받는 건 ‘냉혈한’으로 묘사되는 한수다. 한수는 제주 출신으로 어릴 적 일본으로 넘어왔다. 1923년 간토대지진을 겪으며 일본에서 살아남으며 인정이 없고 냉혹하게 남을 착취하는 인물이 된다. 더군다나 한수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라면 같은 조선인이라도 돕지 않는다.
이에 비해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이 쓴 동명의 장편소설에서 한수는 조선에 대한 애정을 은근히 품고 있다. 물론 겉으론 일본인처럼 행세하지만,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책임감 있는 조선인 어른으로서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며 다른 조선인을 돕기도 한다.
또 소설에서 한수는 자신의 숨겨진 아들 노아(박재준)에게 너그럽고 자애로운 아버지로 행동한다. 냉혹하게 살아남으라며 몰아붙이는 드라마 속 모습과는 다른 모습인 것. 소설에서 한수는 노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라. 모든 조선인들을 위해서, 와세다대 같은 학교에 갈 수 없는 모든 조선인들을 위해 배워라.”
드라마에서 한수가 ‘악역’을 맡게 된 건 이삭(노상현)과 대척점에 세우기 위해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이삭은 조선인을 돕는 목사다. 한수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한수에게 버림받은 선자(김민하·윤여정)와 결혼해 한수의 아이인 노아를 키웠다. 조선인을 돕다 일본 경찰에게 끌려 고문당한 이삭과 살아남기 위해 같은 조선인을 착취하는 한수의 뚜렷한 대비는 일제강점기라는 잔혹한 시대가 당시 사람들을 여러 선택의 기로로 내몰았음을 보여준다.
배우 이민호는 2022년 시즌1 공개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한수는 처절했던 시대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앞만 바라보는 거친 인물”이라며 “절대 선이었던 사람이 생존의 과정에서 절대 악으로 살아가는 변화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 ‘현재’ 응시하는 선자
소설에서 1989년 요코하마에서 살아가는 나이 든 선자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물로 표현된다. 예를 들면 손자인 솔로몬(진하)이 집으로 데려온 여자친구에게 “솔로몬이랑 언제 결혼할 기고?”라고 돌직구를 날린다. 전쟁이나 부족한 음식, 잘 곳 걱정도 안 해도 되니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틈만 나면 자식들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옛 시절을 회상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이삭의 묘지에 찾아가 선자는 이렇게 하소연한다.
“여보. 지난주에 전화왔어예. 솔로몬이 외국 은행서 일자리를 잃어서 이제 지 아빠랑 일하고 싶다 칸다고예. 상상이 돼예? 당신이 우예 생각할지 궁금합니더.”
이에 비해 드라마 시즌2에선 나이 든 선자(윤여정)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드라마에서 선자는 도쿄에 사는 손자인 솔로몬의 집에 벌컥 찾아가 한국 음식인 갈비찜을 해주기도 하고, 일본인인 솔로몬의 여자친구에게 음식 준비를 시키기도 하는 ‘꼰대 할매’로 등장한다. 한편으로 미국에서 유명 대학을 나온 뒤에도 미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이로서 살아가는 솔로몬의 삶을 격려하고 지켜보는 후원자로도 묘사된다.
나이 든 선자의 비중이 커진 건 시간이 지나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애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나이 든 선자는 일본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지만,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일본인이 말을 걸면 피하기 일쑤다. 또 조선인에 대한 혐오를 뱉어내는 일본인들에게도 고개를 숙일 뿐 저항하지 못한다. 동년배 일본인 할아버지에게 호감을 느끼다가도 경계심에 가득 차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배우 윤여정은 “드라마는 어떤 가족의 80년 역사를 따라간다”며 “일본 식민통치가 끝나고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국가가 돌보지 못한 해외동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참혹한 인생을 살아온 이들은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 할까. 순자는 이 복잡한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 그저 응시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상처를 함부로 덮지 않는다. 이 작품이 ‘코리안 디아스포라’(한국 이민)라는 특수한 주제를 다뤘지만, 옛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 “과거와 현재는 이어져”
솔로몬의 역할이 커진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1910~1989년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소설에서 솔로몬의 서사는 대부분 후반부에 서술돼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계 금융회사의 일본 도쿄지사에서 일하며 성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이 주로 담겼다.
반면 드라마에선 1989년 솔로몬의 삶이 곳곳에 삽입돼 있다. 이방인으로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좌절하는 솔로몬의 이야기는 과거를 살아갔던 한수, 이삭, 선자, 노아, 모자수가 겪는 여러 사건과 이어진다. 재일한국인의 삶은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한국계 미국 배우 진하는 “솔로몬은 선자가 한 희생의 결과물인데 그 세대는 그런 부담감을 갖고 있다”며 “처음으로 많은 기회를 누리는 세대인데, 저 역시 부모님의 희생이 많았고, 그런 희생에 대한 고민 등을 이 작품이 아름답게 그려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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