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토레 펜션’이라는 이름을 기자가 처음 들은 건 작년 이맘때였다. 충남에서 장미 정원을 정성껏 가꾸는 정원주가 가 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책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이 말씀을 많이 하더라고요. 저도 아직 안 가봤지만 언젠가 가 보려고요”
알고 보니 국립수목원이 2016년 ‘가 보고 싶은 정원 100선’으로 선정한 정원이 딸린 펜션이었다. 대관령 해발 800m에 자리 잡은 소박한 펜션 사진들에서 문화적 향기가 가득 풍겨왔다. 유럽 정원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꽃들, 공간을 가득 채운 클래식 음반과 책, 모카포트로 내린다는 커피…. 서울의 클래식 음반 전문매장 풍월당의 박종호 대표가 2020년에 다녀와 쓴 장문의 여행 후기도 읽게 됐다. “세상에 럭셔리한 호텔과 멋진 리조트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실천이 함께 따라가는 곳은 드뭅니다. 제 눈은 오랜만에 나흘간의 휴가를 얻었습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푸른 숲과 붉은 꽃만 보았지요.”
이곳에 정말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최근이다. 이 펜션 주인이 지난해 12월 ‘바흐의 숲’이라는 생애 첫 장편소설을 썼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이달 중순 ‘살바토레 정원에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정원 관련 책도 펴낸 것이다. 그는 책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몽상가이자 작가이며, 정원사이자 사진가이기도 하다. 평창군 승마협회 선수 겸 코치로도 활동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말과 꽃을 좋아했다. 30대에 대관령의 고요와 너른 들판에 반해 일찍 귀촌한 후 살바토레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그렇게 윤민혁 살바토레 펜션 대표(50)를 만나러 갔다.
아무리 대관령이라 해도 올해 폭염은 기세등등했다. 그래도 살바토레 펜션의 정원에는 여름꽃들이 그림처럼 피어 있었다. 씨앗을 수입해 파종해 만들었다는 메리골드 라밤바, 초봄부터 서리가 오기까지 개화 기간이 길어 여름 정원의 효자 식물로 꼽는다는 다알리아가 만발해 있었다. 멕시코 고원지대가 원산지인 다알리아의 종류가 이토록 다양한지 처음 알았다. 노란색 꽃잎 가운데 빨간색 붓터치가 그려진 듯한 품종 이름은 ‘푸우(Pooh)’였다. 빨간색 상의를 입은 노란색 아기곰 푸우가 절로 떠올랐다.
알고 보니 그의 소설 제목 ‘바흐의 숲’은 이 펜션의 음악감상실 겸 서재의 이름이었다. 정원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윤 대표가 직접 끓여준 커피를 받아들고 물었다.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신 겁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 나왔다. “제가 3년 전에 갑자기 몸이 크게 안 좋았어요. 외동딸의 일정에 맞춰 살다가 딸을 캐나다로 유학 보내고 나니 크나큰 상실감이 밀려왔어요. 친한 친구와 오해도 생겼고요. 마음에 병이 생기니 내 의지대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조차 없었어요. 펜션 단골손님들 조언대로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었더니 6개월 만에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이 병은 또 찾아올 수 있는데, 그때 영영 회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대관령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는데 아내와 딸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그동안 읽고 좋아만 하던 책을 직접 쓰기로 결심했어요. 바쁘게 살다가 번아웃된 뒤 숨겨진 본능을 깨달은 거죠. 새벽 4시에 이곳에 내려와 커피를 끓이고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썼어요.”
자전적 내용과 평소의 몽상을 섞어 쓴 그의 소설에는 ‘쓸쓸했지만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대관령의 사계절’이 들어있다. 사업 실패로 30대 이른 나이에 귀촌했을 때 그를 품어준 건 ‘혼자만 보기엔 너무 아까운’ 대관령의 자연이었다. 눈이 30cm 쌓이는 대관령의 겨울을 지내면서 비로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묘사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하루하루 정원의 변화가 경이로워 사진을 찍었더니 수 만 장의 사진이 쌓였다. 꼼꼼한 기록이 책의 바탕이 된 셈이다.
그는 처음 펜션 문을 열고 스폰서광고를 했다. 늘 객실은 찼지만 이내 온갖 인간 군상에 실망했다. 광고를 다 끊고 무작정 2008년 영국으로 정원 여행을 떠난 게 인생의 새로운 계기가 될 줄이야. 그곳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고 소나무와 향나무가 있던 기존 정원을 차츰 영국식 정원으로 바꿨다. 희귀한 유럽 꽃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식물 마니아들에게 알려졌고 평창대관령음악제를 찾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유럽의 음악축제는 신사들이 음악감독에게 꽃다발을 주는 문화가 있더라고요. 그게 좋아 보여서 저도 평창대관령음악제 때 맨 앞 좌석을 예약해 큰 가방 속에 꽃다발을 숨겨 넣어갔다가 당시 손열음 감독에게 건넸었어요.”
그가 펜션 근처의 숲길로 안내했다. “대관령 정원사에게 뒷산 산책은 사유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거든요. 걸으면서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의 문장들을 떠올려요.” 은방울꽃 군락지와 햇빛에 반짝이는 고사리 숲을 지나니 독일가문비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곳이 나왔다. “행복이 별 게 아니더라고요. 새 소리 들으며 피톤치드 속에서 시집 한 권 읽고 내려가는 것이더라고요. 요즘엔 승마장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고 있어요. 정원을 곤충들의 놀이터로 만들고 책도 쓰게 된 건 대관령의 자유가 마음에 여유를 줬기 때문이에요.”
윤민혁 대표가 추천하는 음반 5선(選)
피에트로 마스카니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지상 최고 예술의 종합선물세트인 오페라를 좋아한다. 베르디, 벨리니, 푸치니 등의 좋은 작품이 많지만, 시칠리아섬을 무대로 영화를 보는 듯한 이 음반을 특히 추천하고 싶다. 그 유명한 간주곡의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선율과 파국을 예견하는 비장의 서곡이 일품이다.
바흐 <평균율> 글렌 굴드
피아노 음악의 ‘구약성서’라고 불리는 바흐의 걸작이다. 모든 음악이 소실돼도 이 평균율만 살리면 복원된다는 말도 있다. 특히 글렌 굴드의 연주는 탁월하고 심도 있다. 그의 바흐 황홀경을 취해 듣고 싶다면 대안이 없다.
엔니오 모리코네<원스 어픈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S.T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을 자주 듣는다. 그의 주옥같은 명곡들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울려 퍼지는데 그중 최고는 원스 어픈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아닐까 한다. 4시간 영화 내내 심장이 멈출 만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멘델스존 <무언가> 다니엘 바렌보임
멘델스존이 낭만주의 피아노가 절정일 때 창안한 피아노 소품집이다. 그의 윤슬같은 연주에 시적 서정성이 더해져 듣는 이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최고의 피아니시즘이다. 가을날 들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5.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 아리아 모음집
뇌종양으로 이제는 고인이 된 그가 절정이던 시절을 만끽할 수 있는 음반이다. 순수하고 파워 넘치는, 중후하고 세련된 백호랑이의 미성을 들을 수 있다. 음반의 첫 곡 차이코프스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를 들으면 언제나 눈시울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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