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프로축구 K리그 수원과 포항의 챔피언결정전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수문장의 역사적인 맞대결이 펼쳐졌다. 골문을 지킨 수원 이운재와 포항 김병지의 선방에 양 팀은 1, 2차전을 모두 0-0으로 비겼다. 곧바로 이어진 승부차기. 4-3으로 수원이 앞선 상황에서 포항의 다섯 번째 키커로 들어선 건 김병지였다. 그 운명적인 만남에서 이운재는 김병지의 킥을 막아냈고 우승컵은 수원의 차지가 됐다.
김병지 강원FC 대표(54)는 K리그 통산 최다 경기 출전 기록(706경기)을 보유하고 있는 전설이다. 김 대표와 쌍벽을 이뤘던 이운재 전 전북 코치(51) 역시 A매치 133경기(115실점)에 출전한 레전드다. 이운재는 2008년 골키퍼로는 처음으로 리그 최우수선수(MVP)에도 선정됐다.
이운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페널티킥 방어 능력이다. 이운재 자신도 “승부차기에 가서 진 기억이 별로 없다”고 말할 정도다.
요즘 K리그는 무승부를 기록하면 연장전을 치르지만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연장 없이 곧바로 승부차기로 승부를 가리곤 했다. 이운재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이렇게 차곡차곡 승리를 쌓아 올린 이운재의 K리그 통산 승부차기 전적은 11승 1패(승률 91.7%)에 이른다. 개별 페널티킥 선방으로 따져도 58번의 킥 가운데 26개의 막아내 방어율이 무려 44.8%나 된다. 이 역시 K리그 역대 1위다.
많은 팬들의 기억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2002 한일월드컵 8강전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에서 나온 결정적인 선방이다. 전후반과 연장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이운재는 스페인의 4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의 슛을 막아내며 대한민국의 4강 신화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5번 키커 홍명보가 스페인 골문을 뚫으면서 승부차기는 한국의 5-3 승리로 끝났다. 지난해 유니폼을 벗은 호아킨은 “당시 실축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축구나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장기적으로는 내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곤 했다.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골키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운재이지만 시작은 초라했다. 중학교 시절까지 그는 골키퍼가 아닌 필드 플레이어였다. 골키퍼로 전향한 건 지구력이 약해서였다. 이운재는 “중학생 때는 30분 경기라 할 만 했는데 고교 때 40분으로 경기 시간이 늘어나자 따라가기가 버거웠다”며 골키퍼 전향 이유를 밝혔다.
다행인 건 좋은 스승과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청주상고(현 청주대성고) 시절이던 1991년 그는 전경준, 박성배, 서혁수 등과 함께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기초가 없던 그는 골키퍼로서의 실력을 실전을 통해 쌓았다. 당시 그는 유인권 감독으로부터는 승부차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한여름 유 감독이 목에 수건을 감고 나오는 게 골키퍼 훈련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유 감독은 이운재를 상대로 수십 차례 페널티킥을 찼다. 골을 먹는 건 괜찮았지만 방향이 틀리면 불호령이 날아오곤 했다. 유 감독은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며 공을 차고 또 찼다. 이운재는 “골키퍼로서의 기초가 전혀 없던 내게 그 훈련은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이후 승부차기를 잘 막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승부차기 선방의 대단한 비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중앙을 지키고, 공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고 끝까지 본다”는 것이다.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운재는 “승부차기를 할 때 골키퍼에겐 다섯 번의 기회가 있다. 한두 개만 막아도 내가 이기는 게임”이라며 “골키퍼가 그런 태도를 가지면 차는 선수가 쫓기게 된다. 키커가 잘 찬 공은 그냥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직접 골을 먹는 골키퍼는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포지션 중 하나다. 작은 실수 하나가 곧바로 실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운재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지도하는 어린 선수들에게 “골키퍼를 골을 막는 게 아니라 먹는 게 일인 포지션”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어린 선수들은 골을 먹으면 자책을 한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도 상대가 잘 찬 공은 막을 수 없다. 모든 슛을 막을 수 없기에 최대한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뿐”이라며 “골을 먹어도 스트레스 받지말고 다음을 준비하면 된다. 결정적인 한두 개를 막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그가 40살 가까이 현역 선수 생활을 하는 원동력이 됐다.
선수 은퇴 후 수원과 전북, 한국 23세 이하 대표팀 코치 등을 역임했던 그는 요즘은 K리그2 해설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또 경기도 수원월드컵 재단 홍보대사와 충분 진천군 홍보대사 등으로 활동하며 유소년 선수들을 대상으로 골키퍼 클리닉을 열기도 한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도 가끔씩 출연한다.
최근에는 한 축구용품 업체와 함께 자신의 이름 운재의 영문 이니셜 ‘JW’을 넣은 골키퍼 장갑도 출시했다. 원단부터 디자인까지 제작의 모든 작업에 참여한 이운재는 “고가의 골키퍼 장갑은 학생 선수들이 선뜻 끼기가 어렵다. 선수 생활 경험을 통해 나름 합리적인 가격대로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했다”며 “어린 선수들에게 하나씩 선물을 하고 있다. 손목의 꺾임 여부에 따라 골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가 결정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다.
39세까지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가장 신경썼던 건 체중 관리다. 182cm로 골키퍼 치고는 큰 키가 아닌데 몸집이 좀 큰 편이었기 때문이다. 체중이 가벼울 때는 펄펄 날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대량 실점을 하곤 했다. 동계훈련을 거치면 날씬했던 몸매가 시즌을 치를수록 불어나곤 했는데 훈련량은 줄어드는데 계속 경기를 뛰기 위해선 잘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타고난 대식가이자 먹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그는 선수 생활 때부터 수원 지역에 오래 살았는데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수원에서 괜찮은 고깃집을 찾을 땐 이운재 사인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좋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이운재는 “사실 이곳저곳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사인을 해주곤 했다. 지인들을 데려가서 실패한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지금은 선수 생활을 할 때보다 몸무게가 7, 8kg가량 늘었다. 그는 최대한 절식을 하며 광교 호수공원 등을 틈날 때마다 걷는다. 그리고 선수들을 지도할 때는 한 시간 반 가량을 공을 열심히 차 준다. 또 스트레스 해소 겸 운동 삼아 선수 때부터 해오던 골프를 여전히 즐기고 있다.
단단한 하체에 몸집이 큰 그는 축구계에서도 알아주는 장타자다. 마음먹고 때리면 드라이버로 270m를 쉽게 날린다. 하지만 공을 컨트롤 하기 위해 230~240m 정도만 친다.
워낙 거리가 멀리 나가다 보니 스코어도 잘 나온다. 프로 선수들이 치는 백 티에서 플레이해도 싱글을 친다. 핸디캡은 3 안팎이다. 종종 언더파를 치기도 하는데 베스트 스코어는 몇 해 전 강촌 엘리시안에서 기록한 4언더파 68타다.
그는 “선수 때부터 축구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료 선수들과 골프장에서 날리곤 했다”며 “살아있는 공도 몸을 날려 잡는 내가 멈춰있는 공을 제대로 못 친다는 게 신기하면서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는 골프를 칠 때도 승부차기를 막을 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했다. 이운재는 “실수를 해도 지나간 걸 생각하기보단 다가올 홀을 생각한다”며 “욕심을 내지 않고 순리대로 치는 편이다. 공이 러프에 들어가면 무리해서 투온을 노리기보다는 한 타를 잃더라도 빼 놓고 친다”고 했다.
잠시 현장을 떠나 휴식기를 갖고 있는 그는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축구를 통해서 받은 사랑을 축구를 통해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좀 더 공부를 한 뒤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프로 팀이나 대학 팀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아카데미 같은 것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진 노 하우를 어린 선수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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