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원한 천국’ 정유정 작가
“삶이라는게 고통이 좀 더 많아… 쉽게 좌절하고 남 탓하는 세상
맞서다 보면 이겨내는 순간 와… 짧은 청춘, 사랑하며 살았으면”
지난해 9월 소설가 정유정(58)은 이집트 북서쪽 바하리야 사막에 섰다. 수백만 년 전 바다였으나 지금은 모래 위 하얗게 굳은 물결의 흔적만 남은 사막.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을 보며 작가는 마음이 사막 같은 인간들을 떠올렸다. 불치의 병을 앓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사람들. 만약 이들에게 이승의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는 가상세계가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고통이 사라진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그곳은 과연 천국일까.
신작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행나무)을 출간한 정유정은 26일 서울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삶이라는 게 사실 고통이 좀 더 많다. 하지만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려는 야성이 인간의 기질 안에 있다는 얘길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2021년 ‘완전한 행복’(은행나무) 이후 3년 2개월 만에 선보인 이번 장편소설은 공상과학(SF)과 스릴러, 로맨스를 넘나든다. 주요 배경인 사막과 유빙(流氷)의 온도 차만큼이나 뜨겁고 차다. 예약 판매 일주일 만에 4만5000부가 나가 3만 부를 추가로 찍었다.
소설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상세계 ‘롤라’가 등장한다. 인간이 정보 형태로 네트워크에 저장돼 영원히 살 수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실직, 불치병….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소설 속 인물들은 그러나 완벽한 가상세계인 롤라행 티켓을 버리고 유한한 인간으로 고통에 맞서길 선택한다. 그 선택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소설 한 편을 쓰는 데 취재 노트 10권을 수기로 쓰는 그는 이번에도 유발 하라리와 칼 세이건, 안토니오 다마지오 등의 저서를 공부했다. 지난해 2월에는 유빙을 직접 보기 위해 영하 20도 일본 홋카이도 북동부 아바시리를 다녀왔다. 유빙을 부수며 나아가는 쇄빙선도 탔다. 이때 작가의 머릿속에 각인된 풍경은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인물의 내면을 타격하는 유빙의 충돌음으로 형상화됐다.
전작들이 고유정 사건(‘완전한 행복’), 박한상 사건(‘종의 기원’) 등 주로 현실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면, 이번 작품은 작가 내면의 질문에 좀 더 천착한다. 2012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방사선 치료와 약물 치료를 병행해 온 그는 재작년 암 환자 ‘졸업장’을 받았다. 10년 넘게 재발 및 전이가 안 돼 일반 건강검진만 받아도 된다는 진료 의뢰서를 받았다.
투병 기간 짧게 유지하던 머리도 처음 어깨까지 길렀다. 주 6회 7∼10km씩 달리고, 그 길로 체육관에 가서 근력 운동을 한다. 내년 가을 하프 마라톤을 뛰는 게 목표다. 소설에서 가상세계의 유혹을 이길 힘으로 그려지는 ‘야성’은 사실 그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세 동생을 둔 소녀 가장으로 지낸 20대, ‘11전 12기’ 끝에 공모전에 당선된 30, 40대를 거치며 회복탄력성이 길러졌어요. 쉽게 좌절하고 남 탓하는 사회, 야성을 잃어가는 시대이지만 내 인생에 집중하고 맞서다 보면 이겨내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작품 속 인물들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올해 서른이 된 아들을 둔 작가는 특히 이번 책을 통해 20, 30대 독자들에게 가닿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은 사랑이 절망스러운 생을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것. 그는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가치 중 하나가 사랑”이라며 젊은 독자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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