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Creator]〈4〉역사 그리는 30대 화가 서원미
줄지어 걸어가는 전쟁 포로 등… 韓 근현대사 ‘블랙 커튼’ 연작 화제
“유령에 쌓인 먼지 털어내는 느낌”… 해외서도 구매하는 마니아 생겨
2016년, 모교인 성균관대 박물관의 요청으로 26세 화가는 성균관대 창립자인 심산 김창숙의 초상을 그렸다. ‘조선 유림의 마지막 선비’라고 불렸던 심산의 초상에서 강인하고 꼿꼿한 이미지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깜짝 놀랐다. 그림 속 심산은 미라처럼 바짝 마른 채 병상의 흰색 시트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왼쪽에는 모자를 방패처럼 들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 있었다. 모교 창립자의 초상을 화가는 왜 죽음 직전의 모습으로 그렸을까? ● 역사 속 사람들을 끄집어 내놓다
22일 경기 파주 작업실에서 만난 서원미 작가(34)는 “처음에는 부드러운 선비의 모습을 그리려 했지만, 심산에 대해 공부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며 고문을 받다 앉은뱅이가 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음을 알게 됐다”며 “그런 인물의 삶에서 모든 것을 없애고 깨끗하고 화사한 모습으로 남기는 것이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작가는 박 전 대통령이 장군 시절 심산에게 병문안을 와서 찍힌 보도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단다.
작가는 이때를 계기로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장면을 극적으로 그린 ‘블랙 커튼’ 연작을 그렸다. 화상을 입은 포로에게 붕대를 씌워주는 미군, 손을 머리 위에 올린 채 줄지어 걸어가는 전쟁 포로 등 역사 속 장면들을 그 배경을 제거해서 인물만 집중해 그렸다. 최루탄을 피해 걸어가는 사람이 쓴 비닐봉지는 좀 더 단단한 느낌으로, 또 6·25전쟁 때 폭파된 다리를 그린 다음 그 아래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그린 식이다.
서원미는 “죽음에 가까운 이미지를 하나씩 끄집어 내놓듯 그렸다”고 했는데 그 결과 작품은 역사를 단순히 기록하거나 정치적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가 더욱 증폭된다. 6·25전쟁은 물론이고 역사 속 전쟁을 기록한 책부터, 피해자들의 증언록까지 찾아보며 그림을 그렸던 작가는 “오랜 시간이 지나 화석처럼 굳어진 유령에게서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원래 형태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 아픔은 공평하게 다가오는 느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배경으로 폭력의 이미지를 회화에 담은 화가 마를렌 뒤마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독일을 그린 안젤름 키퍼처럼 세계적 미술가들은 역사를 소재로 극적인 이미지를 끌어내고 있다. 최근에는 ‘할렘 르네상스’처럼 정체성과 권리를 적극 주장하는 예술도 각광받고 있다. 특히 역사나 정치를 소재로만 다루는 게 아니라 탁월한 시각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가 주목받는다.
서원미는 “한국에서도 민중미술가들이 근현대사를 그렸지만, 저는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에 거리감을 두고 볼 수 있었다”며 “전쟁을 비롯해 많은 과거의 일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는 감각에 집중해 작업했다”고 말했다.
특히 그가 집중하는 것은 비극적 사건을 겪는 사람의 마음이다. “혓바늘이 나면 혀로 눌러보며 통증을 더 느끼려 한다”는 작가는 “아픔은 공평하게 느끼는 감각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빠가 길리안바레 증후군으로 6개월 동안 신체 절반이 마비돼 누워 있을 때 겪은 공포와 불안은 ‘해부학’ 연작으로 풀어냈다. 바로크 시대의 회화처럼 극적인 분위기가 특징인 이 작품들은 인스타그램이나 온라인을 통해 영국, 캐나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 소장가가 구매하는 등 마니아층이 생겼다.
최근에는 돈키호테에서 영감을 얻은 연작 ‘카우보이 휘슬’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블랙 커튼’ 연작을 할 때는 공부도 많이 하고 그릴 때 심적 부담도 커서 모래주머니를 차고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었다”며 “사랑하는 공주에게 편지를 쓰는 아름다운 시부터 풍차와 싸우는 초현실주의, 산초와 대화하는 선문답 등 여러 형식이 자유롭게 섞인 그림을 그려 보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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