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등 국내서도 주목… 클레어 키건 단편작품 7편 수록
폭력-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 특유의 절제된 문장으로 담아내
◇푸른 들판을 걷다/클레어 키건 지음·허진 옮김/252쪽·1만6800원·다산책방
마냥 걷고 싶은 순간이 있다. 걸으면 생각이 정리될 것 같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발밑에서 낙엽이 느껴질 때 마음은 비로소 차분해진다.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집 ‘푸른 들판을 걷다’ 속 인물들도 내처 걷는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 가톨릭 사제도, 새아버지와 갈등하는 대학생 청년도 달빛 속에 마냥 걷는다.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국내 출판계에서도 주목받았던 소설가 키건의 초창기 단편선이 출간됐다. 국내에서는 세 번째로 소개되는 키건의 작품이다. 1999년 ‘남극’으로 데뷔한 키건은 아일랜드 교과서에도 작품이 수록돼 있을 만큼 자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해 4월, 11월 국내 번역 출간됐던 작품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몇 주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번 선집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일랜드의 현실을 예리하게 그려낸 단편소설 7편이 수록됐다.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여운을 남기는 특징은 여전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문제들을 파고든다. 7편 중 6편이 아일랜드를 무대로 하는데,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남성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이 처한 현실은 암울하고 고단하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에서 가톨릭 사제인 주인공은 성직자라는 역할과 세속적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다. ‘작별 선물’ 속 아버지는 아내의 묵인하에 어린 딸을 성적으로 학대한다. 그는 딸이 뉴욕으로 떠나는 날에는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작별 인사를 받는다. ‘삼림 관리인의 딸’에 등장하는 디건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고 오로지 자기 땅에 집착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2004년 외국 작가들의 단편을 엮은 선집을 출간하며 “따뜻하고 심오한 장면이 머릿속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고 평했던 단편 ‘물가 가까이’도 실려 있다. 졸부 새아버지와 가난한 시골 농가 출신 엄마, 하버드대에 다니는 아들 간의 삼자대면이 언제든 툭 터질 듯 아슬아슬하게 묘사된다. 아들은 시골 촌부로 평생 남편에게 매여 산 할머니의 에피소드를 중간중간 떠올린다. 언젠가 할머니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다를 보러 갔는데, 남편이 약속시간에서 5분이 지났다는 이유로 차를 출발시켜 버렸다. 할머니는 도로에 뛰어들어 차를 세워야 했고, 자신을 버리고 가려 한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았다.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이 교차되며 답답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수록된 단편들에 기승전결이 명확한 에피소드가 있는 건 아니다. 인물들은 대체로 우유부단하거나 연약하다. 현실을 뒤바꿀 만큼 강하지도 않다. 다만 걷는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 자체가 메시지인 듯하다. 짧은 단편은 고작 16쪽에 불과하다.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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