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빠오(tapao, 포장)’는 우리가 싱가포르에 머문 8월 한 달 동안 의외로 가장 많이 썼던 단어 중 하나였다. 거의 날마다 따빠오를 하는 바람에 이 ‘미식(美食)의 나라’에서 외식할 기회가 없었을 정도로.
시작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데라의 한마디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시아 14개국의 기자 17명이 참여하는 단기 연수가 갓 시작된 때였다. 오전부터 세미나가 있는 날은 주로 회의실 앞 복도에서 미니 뷔페로 점심 식사가 제공됐다.
아무리 맛있는 뷔페라도 으레 그렇듯, 그날도 음식이 적잖이 남았다. 그때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많은 데라가 나타났다. 그가 몇 마디 부탁을 건네자, 프로그램 매니저는 어디선가 네모난 플라스틱 일회용기를 순식간에 구해와 남은 음식을 착착 나눠 담은 뒤, 아주 일상적인 어조로 말했다. “따빠오를 원하는 사람은 이따 챙겨가세요!”
나를 포함한 절반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천진난만한 얼굴의 데라가 쓱 나와 설명을 보탰다. “내 고향에서는 음식을 낭비하지 않아. 남은 건 저녁에 먹게 따빠오해서 가져가자.”
중국어 따바우(打包·포장하다)에서 기원한 표현 ‘따빠오’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널리 쓰인다. 음식점에서 사서 가져갈 때도, 먹고 남은 음식을 싸갈 때도 자주 쓰는 말이다. 특히 싱가포르의 따빠오는 날씨가 덥고 빽빽한 이 나라의 의식주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싱가포르 인구 80%는 공공주택 단지에 산다. 집 부엌은 비교적 좁지만, 저렴한 노점상 수십 개가 모인 호커센터(푸드코트)가 ‘지역사회의 공동 부엌’ 역할을 대신한다. 일 년 내내 창문을 열고 사는 이들은 집에서 고기와 생선을 구우며 연기를 피우는 대신, 아침이든 밤이든 호커센터에 모여 식사하고 음식을 사며 ‘따빠오’하는 것이 일상이다.
4주간 낯선 땅, 낯선 숙소에서 낯선 룸메이트와 살게 된 우리 17명도 그날부터 서서히 따빠오에 ‘따며들었다’. 분명 같은 음식이라도 회의실에서 접시에 담아 먹는 점심과 숙소에 돌아와 룸메이트와 나눠 먹는 저녁의 맛은 묘하게 달랐다.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동안 거실에선 따뜻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따빠오 음식들이 집밥 아닌 집밥의 역할을 해준 셈이다.
따빠오 중에서도 백미는 14개국 참석자들이 직접 마련한 음식으로 연 포틀럭(potluck) 파티였다. 공지된 준비 사항은 분명 “각자 한 가지씩”이었다.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늘 먹는 사람의 위장을 고려하지 않는 법. 너나 할 것 없이 양손 그득 먹을 것을 들고 오는 바람에 접시 놓을 자리 마련하는 것이 일이었다.
거실 한쪽에선 알싸한 칠리와 톡 쏘는 커리 냄새가, 다른 쪽에선 달콤 짭짤한 로작(샐러드)과 고소한 만두 냄새가 겹겹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은 대접에 고봉으로 쌓은 쌀밥. 서로 다른 피부색의 손들이 앞다퉈 주걱을 향하는 걸 보고 누군가 “우리 정말 다들 아시아인이 맞나봐”라고 외치자, 저항 없는 웃음이 퍼져 나갔다.
그날 밤의 따빠오는 그야말로 ‘냄비’ 단위였다. 조그마한 플라스틱 용기로는 턱없이 부족할 만큼 음식이 풍성했다. 사람들이 모두들 묵직한 손으로 돌아간 다음 날, 저녁이 다가오자 그룹 채팅방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 메시지가 올라왔다.
“어제 남은 음식으로 파티할 사람…?” “우리도 냉장고가 꽉 찼어. 같이 먹어 치우자!”
마치 추석에 할머니 댁에 다녀온 것처럼, 그 이틀 동안엔 모두 배고플 틈이 없었다. 각자의 손맛을 칭찬하고, 자기 나라의 음식을 맛보라며 자랑하는 와중에도 무슬림과 채식인과 알레르기가 있는 이들이 무심코 실수하지 않도록 접시마다 메모지에 재료명을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한솥밥’은 아니었지만, 각자의 손맛을 모은 ‘한 식탁’ 밥을 먹고, 남은 것은 서로에게 챙겨주고, 다음 끼니도 함께 하자고 약속한 그날, 우리는 우리만의 작은 명절을 지낸듯했다.
싱가포르에서의 4주는 눈물과 웃음을 버무린 작별 인사와 함께 8월 말 끝이 났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지인들은 역시나 “칠리 크랩이랑 카야 토스트 먹어 봤어? 다른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왔어? 뭐가 제일 좋았어?”라며 물 흐르듯 음식이 어땠는지부터 묻는다. 밥심으로 사는 민족인 내 고향 한국답다.
정작 그 유명하다는 칠리크랩도, 카야 토스트도 맛보지 않은 나는 아직 ‘무난한’ 답을 찾지 못해 얼버무리고 있다. 조금 이상한 답이라도 괜찮다면 아마도 난 솔직하게 실토해 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맛은 따로 있다고, 그런데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조금 복잡하다고, 그래도 애써 표현해 보자면 이런 맛이라고.
“틈날 때마다 따빠오라는 걸 해서 밥을 나눠 먹었는데, 그 음식들이 내겐 최고였어. 음식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서로를 살뜰히 챙겨주는 맛. 다른 음식들은 싱가포르에 가면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따빠오들은 어디서 사 먹을 수도, 내가 재현할 수도 없어서 아주 귀중한 기억이거든.”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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