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어둠이 내려앉자 청각이 깨어났다. 주변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쓰르륵 쓰르륵’. 함께 걷던 숲해설가가 여치 울음소리라고 알려주었다. 내비게이션 기계 장치가 없던 세상으로 회귀한 듯한 까만 밤. 발밑을 희미하게나마 비추는 건 우리 일행이 손에 든 호롱불과 야광 팔찌였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길을 잃은 밤의 산책자들이었다.
지난달 31일 경기 포천시 국립수목원에서 진행된 야간 하이킹에 참석했다. 1년에 딱 사흘만 국립수목원이 밤에 문을 여는 ‘여름밤! 광릉숲 썸머 블룸’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 행사에 참여한 200여 명은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수목원 숲길을 걷고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인 장수하늘소와 밤에 피는 빅토리아수련을 관람했다.
10여 명씩 한 조를 이루고 숲해설가가 한 명씩 배정됐다. 수목원 입구에 들어선 뒤 어느 나무 아래에서 숲해설가가 물었다. “여러분, 무슨 냄새를 맡을 수 있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은 감각을 활짝 깨우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을 줄이려고 합니다. 눈과 코와 귀를 활짝 열고 숲을 공기로 느껴보세요. 저기 소쩍새 소리도 들리네요. 깜깜하고 고요한 광릉숲은 소쩍새가 잠들 수 있는 터전이랍니다. 가로등이 없어 우리는 불편하지만, 다른 생명체들은 그 덕분에 잘 수 있습니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죠? 물소리가 나는 곳에서는 반딧불이를 만날 확률이 있습니다. 어제는 반딧불이를 10개나 찾은 분도 계셨어요. 이 길에서 야생 멧돼지도 만났답니다.”
얼마나 흥미진진한 얘기인가. 감각이 깨어나기 전에 이미 탐험가의 정신이 솟구치고 있었다. 밤의 수목원에서 두려움과 호기심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미지의 길을 함께 걷는 탐험의 동료들이 있어 밤은 상상의 세계, 신비의 세계로 거듭났다. “반딧불이다!” 최초의 발견자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였다. 반면 어른들은 물가의 숲을 폴짝폴짝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자꾸만 시야에서 놓쳤다. 스마트폰과 GPS에 방향 감각을 헌납한 이래 반딧불이를 찾는 능력까지 잃은 건 아닐까. 눈을 힘줘 감았다가 다시 뜬 순간 반딧불이를 만났다. 손목에 찬 팔찌의 야광 빛을 닮은 반딧불이는 숲에 내려앉은 별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안전하게 숲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광릉숲 천연림에 조성된 460m 숲생태 탐방로 덕분이었다. 보행이 불편한 분들을 배려해 경사를 낮추고 동선 폭을 조정한 데크길이다. 양옆으로 오래된 나무들이 하악하악 숨 쉬는 숲에서 트롤 요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숲이 내뿜는 시원한 밤공기에서 야생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밤의 수목원은 어둠을 폭력적으로 밀어내버리는 가로등이 없어 경건한 수도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은 손을 마주 잡았을지언정 말을 아낀다.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내면의 풍경화들은 그 길 위에서 포개지고 만날 것이다.
국립수목원 야간 하이킹의 마지막 순서는 수목원 숲길에 매트를 깔고 누워 별을 보는 것이었다. “평소에 별 볼 시간이 없지 않았나요. 바쁘니까, 힘드니까요. 오늘은 여러분 가슴에 별을 담아보는 게 어떨까요. ‘예전에 이런 꿈이 있었지, 이런 희망이 있었지’ 한 번 꺼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제대로 방향을 가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잖아요.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는 별을 찾아 새겨보는 것도 좋겠어요.” 마침 그믐 무렵이라 설탕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맨눈으로도 잘 볼 수 있었다. 대자로 뻗어 누우니 두 어깨를 누르던 묵직한 스트레스 뭉치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대로 숲속에서 잠들고 싶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도심형 수목원들은 번쩍거리는 파티 분위기로 야간 개장을 한다. 하지만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수목원들은 별 헤는 밤에 트레킹하며 야생동물과 새를 만나는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인 국립수목원의 야간 개장 프로그램은 지금보다 좀 더 어둡고 고요해져도 좋겠다. 사유의 행위인 걷기는 밤의 수목원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이번에 들었다.
수목원을 나오는 길에 숲해설가가 물었다. “아까 처음 질문드렸던 곳이에요. 여전히 아무 냄새도 안 나세요?” 비로소 났다. 계수나무 잎의 달콤한 달고나 냄새! 후각이 열린 것이다. 훗날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얘기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밤의 수목원, 그 숲길의 산책을 기억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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