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재벌가와 결혼했다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 하지만 사실 주인공의 삶은 지옥 같다. 배우자와 그 가족들이 제멋대로 굴어도 대거리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고, 가족들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제사까지 준비해도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을 한다는 반응, 그리고 눈칫밥뿐이다. 결국 숨 막히는 결혼에서 벗어나고자 주인공은 이혼을 결심한다.’
2024년 상반기 방영된 ‘눈물의 여왕’이라는 드라마 줄거리 일부다. 제목과 줄거리를 보니 며느리 눈물 쏙 빼는 ‘시월드(시댁 혹은 시집살이)’ 드라마인가 싶지만, 아니다. 재벌가 자제가 여자, 평범한 배경의 신데렐라 주인공이 남자다. 즉 주인공을 괴롭힌 건 시집살이가 아니라 ‘처가살이’였다. 재벌가 결혼, 시한부 인생 등 뻔한 소재를 얽으면서도 이런 변주 덕에 드라마는 호평을 받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위의 처가살이라는 소재가 ‘변주’라는 건 현실에선 여전히 반대 상황이 일반적이라는 이야기다. 드라마에서 명문대 사위들이 전을 부치고 제사 준비하는 모습이 화제였는데, 현실에서 며느리들은 명문대를 나오건 안 나오건 오랜 세월 전을 부쳐 왔다.
2030, 여전히 “시집살이 두렵다”
최근 젊은 2030 세대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흥미로웠던 건 결혼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로 ‘시월드’를 꼽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았다는 점이다. 30, 40대는 물론 20대 젊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성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한다. 유부남인 30대 아는 동생에게 인터뷰 이야기를 했더니 그도 의아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되받았다. “시집살이요? 언젯적 이야기예요? 우리 와이프는 엄마 집에 가면 우리 엄마가 차린 밥 먹고 설거지도 안 해요. 내가 다 하는데요?!”
이 지인의 말처럼 과거 같은 시집살이는 보기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나 어릴 때만 해도 며느리를 새벽부터 밤까지 노예처럼 부리면서 따뜻한 말은커녕 하대와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뜨악한 시집살이 사례를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며느리는 전통 가족 안에서 그야말로 을(乙) 중에 ‘슈퍼 을’이었다. 오죽하면 ‘시집살이는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이라는 말까지 있었을까.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요즘 이런 시집살이를 겪는, 혹은 겪을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을 잘 얻어먹기만 하고 오는 며느리 중 한 명이다.
엄마 통해 간접경험…“세상 빨리 안 바뀌어”
그런데 젊은 여성들은 왜 아직도 시집살이를 두려워하는 걸까? 현재 20, 30대 여성 중엔 엄마나 주변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집살이를 경험한 사람이 많다. 직접 겪진 않았어도 그 고충을 옆에서 지켜봤다. 24세 여성 A 씨는 명절, 제사 때마다 엄마와 함께 제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엄마가 음식을 엄청 많이 해야 했는데, 그거를 제가 다 옆에서 같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매년 명절만 오면 제가 다 두려울 정도였거든요.” A 씨는 본인이 결혼했을 때 그런 걸 요구하는 시댁을 만날까 무섭다고 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대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게 많다는 점도 이들이 든 이유다. 역시 24세인 또 다른 여성 B 씨는 친구 사례를 꺼냈다. “제 친구 남자 친구가 신발 같은 것도 자기가 안 빨고 그냥 베란다 놔두면 어머니가 알아서 빨아주시고, 밥도 차려놓으면 먹고 설거지도 안 한다고 했거든요. 어느날은 남자 친구가 ‘혹시 된장찌개 끓일 수 있냐’ 묻더라는 거예요. ‘밀키트 사 먹으면 된다’ 그러니까 자기는 그런 거 싫다고, 못 먹는다고, 직접 끓여달라 그러더래요. 그런 애들 아직 있는 거 보면 세상은 그렇게 빨리 안 바뀌는구나, 그런 생각 들죠.”
결국 결혼하면 과거만큼은 아니어도 과거 아내, 며느리, 엄마로서 기대되던 전통적 역할에 어느 정도 종속될 거라는 게 젊은 여성들이 가진 두려움이었다. 명문대로 꼽히는 대학을 졸업한 29세 직장 여성 C 씨는 유년 시절 설거지를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한데 그 이유가 서글프다. “우리 엄마, 아빠가 귀에 못이 박히게 한 얘기가 ‘어차피 시집 가면 만날 설거지할 텐데 지금부터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시부모님도 이런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리 나 혼자 거부한다고 되겠어요?”(C 씨)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차별
과거와 비교할 때 사소하고, 어쩌면 시부모님이나 남편은 깨닫지도 못할, 무의식중에 나온 별 뜻 없는 행동을 차별이라 하고 시집살이로 부르는 건 과한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다’는 게 여성들의 말이었다.
“친구 중에 시댁 일로 싸우다가 결국엔 이혼한 친구가 하나 있어요. 결혼할 때 남편이랑 명절 공평하게 챙기기로 약속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명절 당일에는 무조건 남자 집에 가더라는 거예요. 친구가 그걸로 계속 뭐라고 하니까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남편은 이해를 못 하더라는 거죠.” 37세 여성 D 씨 말이다. “사실 차별이란 게 진짜 치사해 보여서 말하기도 어려운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면 시댁에서 닭을 삶았는데 다리를 자기만 안 준다든가. 근데 그런 거 하나하나가 쌓이면 사소하지 않잖아요. 집안에서 며느리 위치를 보여주는 건데요. 막말로 여자들은 시댁에서 누워있는 것조차 불편한데. 사위는 ‘백년손님’이잖아요?”
차별이 크냐, 작으냐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며느리의 지위에 대한 인식, 가부장제 문화, 남편이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불편하다는 게 여성들 말이었다. 그 때문에 닭다리를 안 주거나, 명절 당일은 늘 시댁이 우선순위인 게 결코 작고 사소한 차별로 치부될 수 없었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여성이 여전히 낮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 때문이었다.
美 ‘캣 레이디’ 논란…여성 전통 역할에 반발, 韓뿐만 아냐
여성들의 이런 생각을 피해의식이나 과대망상으로 치부할 순 없다. 여권이 크게 신장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많은 성차별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부동의 1위다. 대기업 여성 임원 비율 역시 11년째 꼴찌다. 부부 중 누군가 일을 포기해야 할 때 일을 포기하는 건 대체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생애 경력 단절을 경험하는 여성이 전체 10명 중 4명에 이른다. 입사할 땐 분명 여자가 많았는데 시간이 흘러 중간 관리자쯤 가면 남자만 남는 직장이 허다하다. ‘여성은 이럴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기반해 알게 모르게 성별분업을 하고 있는 직장도 많다. 만화나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여성은 대체로 서브 캐릭터다.
많은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이런 차별이 강화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관련 설문 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혼과 출산에 부담을 느끼거나 이들을 기피하는 비율은 늘 남성보다 여성이 높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2024년 청년 인식 조사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 중 결혼 의향이 없고 나중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답변은 22.8%였는데, 남녀로 나눠 보면 남자 13.3%, 여자 33.7%로 여성이 2배 이상 많았다. 자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 역시 남녀 차이가 큰데 61.1%, 남자는 69.7%, 여자는 51.9%였다. 특히 25~29세 젊은 여성은 34.4%에 불과했다.
미국에서도 ‘캣 레이디(Cat Lady·아이 없는 독신 여성을 비하하는 말)’ 논란이 한창이다. 공화당 밴스 부통령 후보가 과거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통령 후보 등 일부 여성들을 두고 “고양이나 키우는 독신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나라의 미래까지 망친다”고 비판한 발언이 소환되면서다. 이로 인해 공화당에서 등을 돌린 여성이 적지 않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출산, 가사, 내조를 강요받으며 차별당했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비단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올 추석엔 함께 전을 부치자
여성들이 일방적으로 희생해 왔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남성들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전통사회에서 남녀의 성 역할이 그러했고, 그로 인해 남성들도 피해를 봤다. 남성은 가장으로서 책무와 부담을 크게 지어 왔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 남성보다는 여성이 결혼과 출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더욱 꺼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출산의 주체는 누가 뭐래도 여성이다. 추석이다. 오래간만에 모인 가족들이 서로 사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터다. 혹 저출산이 문제라며 혀를 차고 있다면 지금 당장 부엌으로 달려가 설거지나 전 부치기를 돕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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