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수상 작가 줄리언 반스 신작… 옛 선생 사후에 읽게 된 그의 일기장
내밀한 기록 통해 재구성하는 과거… 기억-역사에 대한 작가 통찰 빛나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줄리언 반스 지음·정영목 옮김/304쪽·1만7500원·다산책방
어느 날 죽은 이로부터 공책 더미를 물려받았다. 공책엔 여러 생각이 흩날려 쓰여 있다. 인간관계, 삶, 종교, 철학 등 주제는 다양하다. 대부분 암호문처럼 복잡하거나 축약해 짧게 적혀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죽은 사람은 부모도, 형제도 아니다. 1년에 두세 번 만나 식사하는 사이였을 뿐이다.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왜 공책을 남겼는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노벨 문학상,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당시 맨부커상)을 2011년 수상한 영국인 저자는 신작 장편소설에서 이런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내밀한 공책이 있다면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완벽한 이해란 가능한가.
신작에서 주인공인 중년 남성 ‘닐’은 세상을 떠난 옛 선생 ‘엘리자베스 핀치’의 공책을 물려받는다. 닐은 20여 년 전 대학에서 열린 성인 대상 강의에서 엘리자베스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장례식이 끝난 뒤 닐은 엘리자베스의 공책을 읽으며 평소 과묵했던 엘리자베스에 대한 다양한 진실을 알게 된다. 가족과 교류가 적었고, 연애나 결혼에 큰 관심이 없던 엘리자베스의 속마음을 읽는다. 엘리자베스가 과거 한 강의로 인해 비판을 받은 과정에서 겪은 상처도 이해해 나간다.
특히 닐은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331∼363)의 삶에 빠져든다.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을 휩쓸던 기독교를 거스른 인물이다. 처음엔 진실을 탐구하는 자로 추앙받다가 이후 배교자로 낙인찍혔다. 닐은 율리아누스라는 한 인물이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깨닫는다. 자신 역시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을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뿐 다층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이다. 사실 한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지도 않다. “일관된 서사란 것은 대립하는 판단들을 화해시키려 하는 것이기에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해하는 일을 포기하란 말은 아니다. “현재의 과제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교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자신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본다. 뭐,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는 문장에선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통찰력을 맛볼 수 있다.
소설 후반에 이르러 닐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엘리자베스의 전기를 쓸 것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닐은 쓸 것인지, 쓰지 않을 것인지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공책을 읽으며 자신이 과거보다 엘리자베스를 더 잘 이해했을 거라 짐작한다.
신간은 옛 선생의 죽음 이후 펼쳐지는 제자의 추적기를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섬세한 문체로 풀어내 읽는 맛도 있다. 다만 약 80쪽에 이르는 율리아누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읽는 과정은 다소 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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