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기개로 일군 야생의 경관… 경북 포항 기청산식물원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18일 07시 00분


한국 특산식물인 백양꽃이 피어난 경북 포항 기청산식물원. 21일 이후에는 빨간색 석산(꽃무릇)이 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여기에서 폴짝, 저기에서 폴짝. 태어나서 지금껏 본 것보다 많은 수의 개구리를 단 하루 만에 본 것 같다. 부채로 부지런히 내몰아 보려 했던 한낮 모기의 기세도 대단했다. 오죽하면 명아주 앞에 ‘모기 물린 데에 잎을 짓이겨 즙을 내 바르세요’라는 팻말까지 있을까. 곤충을 위한 유토피아, 즉 인섹토피아(insectopia)가 있다면 이곳일 것이다. 꾀꼬리와 소쩍새 등 온갖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면서는 도시가 재(再) 야생화되는 과정의 어디쯤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 사립식물원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기청산식물원. 청하(淸河)는 맑은 물이란 뜻의 지명이다. 설립자 이삼우 원장(83)의 딸인 이은실 부원장(56)이 말했다.


기청산식물원은 울릉도에만 자라는 섬남성을 서식지외 보전하고 있다.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건 천남성이에요. 원래 무성했던 잎은 열매가 익으면서 쓰러지고 있어요. 꽃은 코브라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겼는데 실제로 독성이 많아요. 옛날에 임금님이 사약을 내릴 때 쓰였죠. 지금은 연구 끝에 약재로 사용되고 있어요. 천남성이 기본 종(種)이라면 울릉도에만 자라는 섬남성도 있어요. 잎에는 줄무늬가 있고 초록색이던 열매는 익으면서 빨간색이 돼요. 이 열매를 옮기는 게 새인지 들짐승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부터 식물원 곳곳에서 자라고 있어요. 처음에는 사람이 자연을 흉내낸 ‘생태 조경’을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새와 벌들이 그려가고 있어요. 참 기특하죠.”

이은실 기청산식물원 부원장이 식물원 곳곳을 설명하고 있다.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기청산식물원은 서울대 임학과를 나온 이삼우 원장이 부친이 운영하던 과수원을 야생의 숲 같은 식물원으로 바꾼 곳이다. 한국 식물학계의 아버지로 통하는 고 이창복 교수(1919~2003)의 제자인 그는 우리 자생식물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다. 1960년대 중반 고향인 포항으로 내려와 모감주나무와 참느릅나무 등을 심으면서 식물원의 기초를 닦았다.

기청산식물원 설립자인 이삼우 원장.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살충제를 쓰지 않는 자연 농법을 도입해 곤충들의 천국이 되느라 과실수는 벌레를 먹었지만, 그간 정성껏 심어 키운 우리 자생식물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청산식물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 사립식물원이자 식물학도들에겐 교과서 같은 장소가 됐다. 2만여 평 부지에 2000여 종의 자생식물이 사는데, 이 중 800여 종이 희귀특산식물이다.

●국내 희귀·멸종위기 식물의 지킴터

이 식물원의 설립 취지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목적으로 한 홍익인간 세상을 열어가는 데 식물학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대표적 활동이 국내 희귀·멸종 위기 식물의 서식지 외 보전이다.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해 본래의 서식지에서 멸종했거나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을 체계적으로 보전, 증식해 생물 다양성을 유지한다.

기청산식물원의 멸종위기식물전시원.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특히 포항에서 가까운 울릉도의 멸종위기 식물들을 보전하고 있다. 일례로 섬개야광나무는 전 세계에서 울릉도에만 자생한다. 절벽에 자라면서 결실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생존력이 매우 약한 이 식물을 기청산식물원의 전문 인력들이 주기적으로 울릉도에 가서 모니터링한다. 서식지외보전기관인 기청산식물원으로 채취 혹은 수집해 오면 인공증식 연구 및 대량증식을 통해 보전하는 방식이다. 식물의 이력을 철저하게 관리해 국가식물종관리시스템에 등록해야 산림생명자원 관리가 제대로 되고 수입 식물이 종종 자생종으로 둔갑해 유통되는 걸 막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수목원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는 나무들

기청산식물원을 걷다 보면 썩어 쓰러진 나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자체를 자연의 순환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로 만든 생울타리도 이곳에서 처음 봤다.

왼쪽이 은행나무로 만든 생울타리.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 원장이 참느릅나무 앞에 섰다. “이 나무는 참 대단해요. 1년의 절반은 잎이 거의 없는 상태로 살아요. 잎이 무성해 그늘을 드리우면 다른 식물이 잘 자랄 수 없으니 태양 에너지를 양보하는 것이죠. 나무의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배울 게 참 많아요.”

‘대왕 나무’(King Tree)로 불리는 높이 15m, 가슴둘레 350cm의 낙우송도 꼭 봐야 한다. 호흡근이 발달해 마치 오백나한이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몰려오는 정경 같다는 평이다. 이 원장은 말한다. “은혜를 보답하는 의리 있는 나무라 해마다 막걸리를 한 말씩 대접합니다.”

기청산식물원 ‘킹 트리’ 앞에 선 이삼우 원장.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게 무슨 말인가. “원래 이 나무가 있던 자리는 우리 식물원 소유가 아니었어요. 10여 년 전 어느 날, 나무 근처에 갔는데 주택단지를 조성하려고 대형 굴삭기가 들어오는 게 아니겠어요. 당장 멈추게 하고 융자를 받아 주변 토지를 사느라 이자 부담으로 오랫동안 고생했어요. 어느 날, 나무 앞에서 ‘의리상 네가 이자라도 좀 물어 줘야 할 것 아니냐’고 넋두리를 했는데 그 후 열흘이 못 돼 방송사에서 이 나무를 주제로 한 특집 프로그램 제안이 왔어요. 방송 후 전국에서 관람객이 몰려와 1년 치 이자를 갚을 수 있었죠. 이 나무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50세 되던 해였어요.”

●‘K-에코 투어리즘’의 가능성

기청산식물원의 9월은 석산(꽃무릇)의 계절이다. 붉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등 각종 상사화가 여름에 피고 난 후 9월 중순부터 볼 수 있는데, 올해는 더위로 인해 21일 이후 개화가 예상된다. 개인적으로는 석산을 볼 때마다 ‘이루지 못한 사랑’(꽃말)의 슬픔을 숨기려 빨간 립스틱을 바른 것 같아 애달픈 심정이 든다.

올해는 21일 이후 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기청산식물원의 석산(꽃무릇). 기청산식물원 제공
식물학계와 관련 업계는 기청산식물원을 두고 “자존심과 사명 없이는 개인이 이토록 오랫동안 유지해 올 수 없는 곳”이라고 존경심을 보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부원장인 딸에 이어 손자까지 삼대(三代)가 식물원에서 일하며 힘을 더하지만 새로 생겨나는 국공립 식물원들에 비하면 시설이 낡고 투자 여력도 없다. 야생의 자연과 우리 자생식물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보석 같은 장소이지만 반짝거리는 시설과 전시를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밋밋한 장소일 수도 있다.

기청산식물원은 물확에 늘 무궁화를 띄운다. 무궁화가 참 고와 보인다.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그럼에도 기청산식물원은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에코 투어리즘’(eco tourism·환경 보호와 지역 발전을 목표로 하는 여행)의 가능성이 큰 곳이다.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열린 세계식물원총회에서 기청산식물원이 울릉도 희귀특산식물 보전 활동을 소개하자 각국의 관계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세계적으로 야생 동·식물 관광은 요즘 ‘뜨는’ 분야다. 한국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식물을 보기 위해, 그 식물이 초대한 새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광객들이 밀려드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그에 앞서 우리 국민부터 우리 식물의 진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기를, 국내 사립식물원들도 창업 정신과 전통은 지켜나가되 필요하다면 시대 흐름에 맞게 변신할 용기를 갖기를, 기업과 식물원이 더 많이 협력하기를, 무엇보다 사회 지도층이 한국의 특산식물이 미래세대의 소중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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