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총 12년을 거쳐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 졸업 후에는 취직을 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인생 코스입니다. 그렇게 마치 인생이 정해진 듯 살다가, 문득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을 겁니다. 길 위에서 중간 중간 한 번씩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시기가 오기 때문입니다.
유튜버로 활동 중인 ‘전진소녀’ 이아진 씨(22)는 이런 한국 사회의 관성을 깨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와 빌더(목수) 일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고등학교 자퇴 후 빌더(목수)로 활동하다 건축학도가 된 청년’ 아진 씨의 성장 이야기를 〈브렉퍼스트〉 팀이 들어봤습니다.
따돌림 속 시작된 용기
책상 앞에 앉아 끈기있게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딸. 어머니는 딸이 한국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걸 걱정했습니다. 수업보다는 방과 후 활동, 체육을 더 열심히 하면서 중학교 1학년까지 참 재밌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좀 더 자유로운 학교생활을 하길 바랐던 아진 씨는 14살이던 2016년 1월, 호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호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부딪히면서 배우는 영어가 더 나답다’라고 생각해 별 준비 없이 오른 유학길이었습니다. 적응이 늦어지면서 따돌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니 급우들이 놀려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고요. 결국 밥도 혼자서 먹고 수업을 들으러 갈 때도 혼자서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종이를 구겨 아진 씨를 맞추는 ‘놀이’를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괴롭혀도 되는 애가 나였구나’라는 생각에 아진 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충격은 이내 ‘용기’로 바뀝니다. 자신을 괴롭힌 남학생의 멱살을 잡아버린 겁니다. 이어 구겨진 종이를 집어 들고 남학생 셔츠 안에 욱여넣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용기가 마음속에서 반짝인 순간이었던 것일까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후로 영어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어요. 성적도 오르고 자신감이 생기니까 같이 다니는 친구도 생겼어요.”
관성에 회의 느낀 고교생, 자퇴하다
유학 생활이 좀 순탄해졌다 싶은 어느 날, 아진 씨는 문득 회의를 느꼈습니다. ‘건축가’를 꿈 꾸며 대학 진학을 향해 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어느 정도 이름있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한 뒤에는 이름 있는 회사에 취직해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멋있는 건축가가 돼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문득 ‘그러면 좋은 건축가가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다니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더라고요.”
아진 씨는 자신을 잘 알았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시간만 낭비하고 자퇴할 것이 뻔했습니다.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는 뭔지, 나는 뭘 잘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방황은 1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부모님과 의논 끝에 내린 결론은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직접 찾아봐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루하루 의미 없이 학교에 다니고 시간을 보낼 바엔 차라리 사회로 나가 원하는 걸 직접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시더라고요. 그 조언에 공감해서 자퇴를 택했어요.”
정글에서 살아남기
한국으로 돌아오며 아진 씨는 ‘직접 두 발로 뛰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사실 막연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보낼 순 없었던 그는, 마침 목공을 배우며 목조 주택 건축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현장을 찾았습니다.
“처음부터 ‘목공이 내 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죠. 그런데 직접 톱으로 나무도 잘라보고, 자그마한 선반도 직접 만들어보니 자연스럽게 목공이랑 친해졌어요. 건축에 관한 관심도 여전했으니, 두 손 두 발로 직접 집을 지어보면 깨닫는 게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죠.”
사회생활은 정글이라고 하던가요. 울타리로 보호받던 학교와 달리 현장에서는 일일이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동냥으로, 어깨너머로 배워야 했습니다. 뻔뻔함을 발동시켜 아버지뻘 되는 현장 ‘선배’들과도 친해져야 했고요.
‘하루빨리 어엿한 빌더(목수)가 돼 1인분을 꼭 해내겠다’는 생각에 일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한 뒤에도 다시 현장을 찾았습니다. 자신이 연습해 본 것이 ‘선배’들이 한 것과 같은지 비교해 가며 일을 익히기 위해서였죠.
어느 날엔 몸집보다 더 큰, 20㎏가량 되는 합판을 지붕에 올리려다 되려 그 합판에 몸이 깔린 적도 있고요. 그래서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힘도 길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합판은 물론, 시멘트 한 포대(약 40㎏)도 거뜬히 들고 계단을 오를 정도로 요령도 생기고 힘도 세졌습니다. 그렇게 약 6년간 지은 집이 스무 채가 넘습니다.
아진 씨를 ‘10대 소녀’로만 바라보는 현장 분위기는 또 다른 난관이었습니다.
‘어떻게 어린 여자애가 현장에서 일을 하냐, 여자가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겠냐, 얼마 못 가 그만둘 것 아니냐….’
목조 주택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10대 소녀 목수라는 생소한 모습의 아진 씨에게 편견 섞인 날카로운 말들이 많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사고 치고 이런 현장에서 막일하는 것 아니냐’고 근거 없는 추측으로 비아냥 대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아진 씨가 자신의 성장기를 남기는 유튜브 채널에도 그런 종류의 악플이 달리곤 합니다.
처음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아진 씨는 ‘그렇지 않다’고 해명하느라 바빴다고 합니다.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편견 섞인 말들을 계속 듣다 보니 스스로 제 정체성이 의심되기 시작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목공을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성장을 위해서 계속하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래서 일일이 해명하기보다는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믿고 가는 법에 대해서도 배웠고요.”
직업은 꿈이 아닌 ‘수단’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그는 ‘사람의 이야기가 채워져야만 콘크리트 덩어리였던 것이 비로소 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 고민하면서 ‘사람들을 웃게 해주는 건축을 하고 싶다’는 목표도 생겼고요. 기본기를 쌓으면서 재밌게 일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는 생각이 들 무렵, 새로운 배움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2년 늦은 23학번으로 국내 한 대학 건축학부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서 설계 수업을 들었는데, 제 작품에 대해 교수님이 비평을 해주셨거든요. 흔히 ‘까인다’고 표현하는데, 저는 뭔가 배운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어요. 한 달 동안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건축학 공부가 힘들긴 한데, 더할 나위 없이 너무 재밌게 공부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돌고 돌아 아진 씨의 꿈은 결국 건축가인 것일까요?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직업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 가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제 꿈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사람들이랑 함께하는 것인데요. 그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 직업은 자주 바뀔 수도 있겠죠. 우리의 꿈을 직업을 갖는 걸로 단정지어 버리면 빨리 끝나버리잖아요. 직업이 갖는다는 게 끝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요.”
목수뿐 아니라 유튜버, 작가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아진 씨에게 마지막으로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물었습니다. 그는 “요즘 들어 더 간단해지는 것 같다”며 ‘행복’을 꼽았습니다.
“꿈과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어쩌면 너무 멀리 쳐다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요. 오늘의 목표, 내일의 목표를 만들고 이를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 제가 너무 힘들어하더라고요. 결국 행복해지려고 꿈을 좇는 것인데, 오늘 행복하지 않다면 20년 뒤에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싶어서 지금은 사소한 것에도 행복해하려고 합니다.”
직업과 행복에 대한 철학을 말하는 그의 눈빛은 진지했지만, 20대 초반 청년 특유의 발랄함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보며 저 자신한테 ‘사랑해!♡(직접 양손으로 하트를 그려 보이며)’라고 외친단 말이에요. 이렇게 하니까 에너지가 솟더라고요.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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