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귀족 질병 등 미화되다
산업혁명 거치며 치명률 높아져
한국전쟁 관련된 한타 바이러스 등… 인류 역사와 함께한 미생물 이야기
◇역사가 묻고 미생물이 답하다/고관수 지음/264쪽·1만8500원·지상의책
유럽에선 18세기 초반까지 결핵은 ‘미지의 질병’이었다. 천연두처럼 고름이 차거나 콜레라처럼 설사가 쏟아지는 등 결핵에선 눈에 띄는 증세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쇼팽, 파가니니,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등 예술가나 귀족들이 결핵을 앓다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부유층 사이에서 번지는 유전적 질환이라는 인식도 퍼졌다.
혹자는 한 발 더 나아가 결핵이 여성미를 부각한다고도 주장했다. 병세로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이 커진 것처럼 보이며, 열로 옅은 홍조를 띤 모습이 여성미를 강조한다는 것. 당대 일부 여성들이 일부러 결핵에 걸린 듯한 외모로 꾸미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이는 완전히 뒤바뀐다. 산업혁명으로 노동자들과 도시 인구가 불어났다. 이들 사이에서 결핵이 감염병처럼 퍼지며 점차 ‘노동자의 질병’이 된다. 치사율이 높아지며 ‘백사병(White Death)’으로도 불렸다. 저자는 “결핵균의 생장이 매우 느려 증상도 더디게 나타나 ‘낭만적 질병’처럼 보였지만 인간이 만든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결핵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 치명적 질병이 됐다”고 설명한다.
성균관대 의대 미생물학교실에서 항생제 내성세균 등을 연구하는 저자가 인류와 공생하며 함께 진화해 온 미생물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맨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작은 생물이란 뜻의 미생물은 통상 진균, 원생동물, 세균, 바이러스 등을 포함하는 개념.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 산업혁명기, 제1·2차 세계대전, 현대까지 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미생물이 인간 생활, 문화, 의학, 전쟁 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짚는다.
지난해 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터에 쥐 떼가 들끓어 ‘한타 바이러스(Hanta Virus)’가 창궐한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랐다. 유행성출혈열의 일종인 이 바이러스는 과거 6·25전쟁 때도 확산하며 양측에 큰 피해를 끼쳤는데 서로가 ‘적이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의심할 정도였다. 이 바이러스는 고려대 의대 이호왕 박사가 1970년대 실체를 밝혀냈는데, 6·25전쟁 격전지이자 바이러스를 발견했던 한탄강의 이름을 따 ‘한타’ 바이러스로 명명했다.
이 밖에도 매독균은 콜럼버스 항해선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처음 옮겨지고, 아프리카 황열병은 노예무역선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등 ‘미생물 역사’도 다채롭게 펼쳐진다.
책은 미생물을 단순히 질병의 원인으로만 인식하는 데서 벗어나 건강과 생명에 필수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차피 미생물은 자기들이 할 일을 할 뿐 이를 유용하게 이용하거나 악용하는 건 사람들의 몫”이라고 설명한다.
막연하게 두려워하거나 반대로 중시하지 않았던 미생물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 준다. 미생물을 단순히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편협한 시각에서도 벗어나게 해 준다. 다만 바이러스의 학명, 유명 학자, 원전을 곳곳에서 인용하는 대목은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