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 줄 알았다. 짧은 망연자실에 이어진 생각입니다. 불면의 밤, 그리고 졸음이 쏟아지는 밤에도 신상품과 세일로 휴대전화 액정을 환하게 밝힌 채 함께 새벽을 맞았던 단골 쇼핑몰이 문을 닫았습니다. 오랫동안 매장과 온라인몰을 운영하면서 돈을 쏟아부어 콘텐츠를 만들던 회사였는데 말이죠.
황망한 이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런던에서 40년 동안 매장을 운영하며 글로벌 명품 플랫폼으로 성장했던 매치스도 파산했어요. 매치스의 폐업은 업계와 전 세계 단골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죠. ’매치스가 망했다면, 다른 곳은 살아남을까’ 라는 공포를 저도 느꼈으니까요.
글로벌 럭셔리 패션플랫폼 파페치는 기업회생 절차를 밟다가 쿠팡에 인수됐습니다. 당시 쿠팡의 ‘플렉스’는 멋져 보였지만, 지금 보니 대책 없이 디올백을 산 저만큼이나 경솔해 보이네요.
현금으로 캐시백을 주던 또 다른 럭셔리 쇼핑 앱은 ‘그냥’ 사라졌어요. 앱의 일시적 에러로 생각했다가 ‘위메프 사태’에 혹시나 해서 기사를 찾아보니 이미 몇 달 전에 없어졌더군요. ‘최고의 명품 플랫폼이 될 것’이라는 대표의 인터뷰는 남아 있었지만 제가 쌓아둔 현금(포인트)은 사라졌어요. 찾아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사실, 이럴 줄 알았거든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코로나19와 인류가 전쟁을 치렀는데, 승자는 플랫폼(앱)이었어요. 덕분에 넘치게 투자를 받은 명품거래 플랫폼들이 경기 후퇴와 함께 저주라도 받은 듯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거예요. 김희애와 김혜수와 주지훈의 멋진 광고들 기억하시죠? 투자를 받기 위해 최고의 명품들을 내걸고, 가장 비싼 스타들과 광고비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죠. 이른바 3대 명품거래 플랫폼 ‘머스트잇, 트렌비, 발란(머·트·발)’의 화려한 도약과 투자유치 소식이 날마다 쏟아졌고, 사람들은 구찌나 발맹을 피자처럼 배달받았잖아요.
하지만 진실이 드러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다들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요. 샤넬이나 루이비통, 셀린느 같은 슈퍼 명품들은 압도적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어서 지금 어떤 플랫폼과도 협상이 안 돼요. 유통플랫폼은 명품 팔아서 복사지 한 상자 살만한 이윤도 내기 어려워요. 백화점들조차 샤넬, 에르메스 같은 슈퍼 명품들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공짜로 내주고, 수익은 힘없는 브랜드에서 받아내잖아요. 결과적으로 명품거래 플랫폼들은 투자받은 돈으로 샤넬과 루이비통 매출만 올려줬을 뿐, 정작 돈을 벌 수는 없었던 거죠.
당근마켓, 구구스, 중고나라, 번개장터 같은 중고거래 플랫폼들도 코로나19 시기에 투자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결제 페이를 만들고 부동산과 일자리도 거래하고 전문 판매자들도 입점시켰어요. 가능한 모든 수익모델을 실험 중이라 우려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아요. 하지만 전 지구적 재난 속에 중고거래 플랫폼들은 친환경과 윤리적 소비라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브랜딩하는 데 일단 성공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스스로를 ‘영 앤 리치’라고 생각하는 MZ 세대의 심리와 딱 맞아떨어졌고요. 2008년 약 4조 원 수준이던 국내 중고거래 시장 규모는 2025년에 10배가 넘는 43조 원으로 성장이 예상된다고 해요.
이 성장을 이끄는 게 MZ 세대의 접근이 쉬운 중고 명품이라는 거죠. 승리의 여신이 신상 대신 중고를 선택하는 듯 보이자 ‘머, 트, 발’ 모두 중고 명품거래에 뛰어들었습니다. 중고거래에 희망을 거는 거죠. 당근마켓, 구구스 등 중고거래 선발주자들과 머.트.발 같은 명품 플랫폼들이 일대격전을 벌일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최근 여러 쇼핑몰에서 전에 보지 못한 할인율과 현금 쿠폰을 보내옵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열어봤겠지만, 요즘은 이런 필사적 마케팅에 다음엔 여긴가 싶어 소름 돋습니다. 그중에 반가운 소식도 있어요. 영업 중단했던 제 오랜 단골 쇼핑몰이 빈티지 가게로 운영을 재개한대요. 중고 쇼핑의 맛은 직거래!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