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칸짜리 세상에서 평온을 찾는 것[소소칼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29일 08시 00분


지난해 7월 체코 파르두비체 시의원회관 대강당에서 국제체스대회 ‘체코투어’ 1라운드 경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 대회에는 48개국 1066명이 참가했다. 파르두비체=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한해의 절반을 넘기면서부터 몇몇 선배와 동료들은 올해도 내가 체스 대회에 나가는지 궁금해했다. 지난해 여름 내가 체코에서 열린 체스 대회에 출전한 게 인상적이었는지 기억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물론 내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어릴 적 체스에 빠진 뒤로 ‘매년 국제 대회에 출전하겠다’는 목표가 버킷리스트 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참석했던 국제 체스 대회 ‘체코투어’는 48개국, 1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참가하는 나름대로 규모 있는 대회였다. 이 대회는 매년 여름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열차로 한 시간 넘게 떨어진 파르두비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린다.

대회장은 웅장하고도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었다. 넓은 강당에 수백 개의 책상과 체스판이 깔렸고, 홀을 둘러싼 2층 테라스 난간에는 참가 선수들의 국기가 걸렸다. 선수들은 이곳에서 매일 한 경기씩, 총 아홉 경기를 치렀다. 비록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체스판을 가운데 두면 남녀노소, 인종 가릴 것 없이 즐겁게 대국을 치를 수 있었다. 꼬마와 할아버지가 실력을 겨뤘고, 러시아 선수(공식적으로 러시아 선수들에게는 출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 세계체스연맹 소속으로 출전한다)와 우크라이나 선수가 마주 앉기도 했다.

대회 도중 사귄 체코 친구들이 야외 경기장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설정 샷. 백이 살짝 앞서고 있다. 파르두비체=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개인적 흥미보다 중요한 건 취재였다. 토요판 1개 면을 채우기로 하고 떠나왔기 때문이었다.
(▶관련 기사: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30811/120673603/1)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질문들을 추려봤다. 나름 오래 체스를 즐겨온 나로서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떠올랐다. ‘체스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황금 같은 연휴에 수백만 원을 들여 이 작은 도시로 모여들까.’ ‘30년 전에 세계 챔피언이 인공지능(AI)에 무릎 꿇고, AI가 정답지 노릇을 하고 있는데, 대체 어떤 즐거움이 남아있는 걸까.’

내 경기가 일찍 끝나면 대회장을 서성이며 인터뷰이를 찾았다. 눈을 두 번 넘게 마주친 선수에게는 자비 없이 다가가 영문으로 된 명함을 내밀었다. “난 체스가 별로 인기 없는 나라에서 온 기자인데, 체스의 매력을 알리는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 인터뷰 좀 해줄래?” 그러면 대부분 선수는 마음을 열었다.

네덜란드에서 IT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또래 알베르트 판 위르크 씨(31)도 그중 한 명이었다. 창백한 피부에 푸른 눈, 비쩍 마른 그의 외모는 ‘은둔 고수’의 분위기를 풍겼다. 알고 보니 실력은 형편없었다. 매 라운드 그의 순위는 곤두박질쳤고, 내가 그를 발견했을 땐 하위권 그룹에서 막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들과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아홉 살배기 한국 소녀에게 혼쭐나고 분개하고 있었다.

판 위르크 씨는 2년 전 드라마 <퀸스 갬빗>을 보고 체스를 두기 시작했다고 했다. 시작이 늦어서인지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고, 경기에서 질 때가 더 많았지만, 점점 빠져들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삶에 지치는 순간마다 체스 사이트에 접속하는데 체스판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 없다고. 그것이 체스를 두는 이유라고 했다. 이 64칸짜리 세상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안식처란 것이었다.

대회 마지막 날 진행된 시상식. 체스 말 인형 탈을 쓴 꼬마가 시선을 독차지했다. 파르두비체=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대회 마지막 날 진행된 시상식. 체스 말 인형 탈을 쓴 꼬마가 시선을 독차지했다. 파르두비체=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대회가 진행되는 일주일 동안 인터뷰한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체스를 두는 이유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비슷했다. 인생에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많이 없는데, 이 작은 세상에서는 몇 수 앞을 내다보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 실수해서 지더라도 다음 경기는 늘 같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온전히 몰입하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온갖 고민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니까. ‘재밌어서’나 ‘똑똑해질 것 같아서’처럼 단순한 답을 예상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훨씬 심오했다.

선수들의 인터뷰를 정리하다 보니 문득 ‘나는 왜 체스에 빠져들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스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건 대학을 졸업할 때쯤, 진로가 불확실하던 시기였다. 중요한 시험과 면접을 앞두고 불안할 때면 체스 앱을 켜 정신없이 체스를 두며 시간을 태웠다. 긴장되는 순간에도 체스판을 보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누구에게나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공간이 꼭 체스판일 필요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바둑판이, 탁구대가, 소환사의 협곡이 그런 안정감을 주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고, 불안과 낙심으로 ‘그냥 쉬었다’라고 답하는 청년 세대가 늘어가는 요즘, 그런 공간 하나쯤 갖는 것은 생각보다 큰 축복이다.

다음 출전할 대회는 ‘체스계의 윔블던’이라 불리는 한 토너먼트로 정했다. 곧 접수가 시작되는데 내년 1월 네덜란드에서 열린다고 한다. 마침 판 위르크 씨가 사는 도시(위르크)와도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서 열린다. 그가 대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짬 내서 찾아가 오랜만에 체스 한판 둘 생각이다. 얼마 못 본 새 그의 실력도 많이 늘었을까.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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