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는 호수가 많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은 물이 곳곳에 강으로 흐르고, 호수를 만들어 낸다. 스위스 남서부 프랑스와의 국경 인근의 ‘레만호’는 알프스 산지 최대 호수다. 스위스는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인데도 레만호 덕분에 지중해 못지않은 청량감 넘치는 풍경으로 각광받고 있다.
● 그룹 퀸이 사랑했던 몽트뢰
알프스의 빙하가 흘러내린 레만호의 물은 엄청 깨끗하고 맑다. 에메랄드빛 호수는 바닥까지 훤히 보인다. 길이 72km, 너비 14km인 초승달 모양의 레만호 둘레는 180km. 자전거로 쉬지 않고 한 바퀴 도는 데 12시간이 걸린다.
바다처럼 보이는 레만호에서 흘러나온 물은 프랑스의 남쪽으로 흐르며 론강이 된다. 레만호의 서쪽 끝 제네바가 국제기구가 몰려 있는 금융도시라면, 동쪽 끝에 있는 몽트뢰는 프랑스의 니스나 칸 못지않은 국제적 휴양도시다. 제네바의 명물은 레만호에서 약 140m 높이로 연중무휴 물을 뿜어내고 있는 제네바 대분수(Jet d‘eau de Geneve)다. 몽트뢰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마르셰 광장의 프레디 머큐리 동상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마침 영국의 전설적인 록그룹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생일(9월 5일)이 있는 9월 첫째 주말. 왼손에 지팡이를 짚고 오른손을 번쩍 들고 있는 머큐리의 동상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팬들이 가져온 꽃으로 장식돼 있었다. 머큐리의 트레이드마크 복장인 흰색 러닝셔츠에 콧수염을 달고 찾아온 남성 팬도 있었고, 광장에서는 여성 팬들이 모여 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마르셰 광장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의 몽트뢰 카지노에는 퀸의 음반을 녹음했던 스튜디오가 있다. 몽트뢰는 1967년부터 매년 여름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했는데, 이 스튜디오 덕분에 ‘퀸의 도시’가 됐다.
머큐리는 “몽트뢰는 나에게 제2의 고향. 영혼의 평화를 원한다면 몽트뢰로 오라”고 할 정도로 이 도시를 사랑했다. 생전에 그가 즐겨 식사하고 산책하고 곡 작업을 했던 단골집들은 지금도 ‘프레디 머큐리 투어’ 코스로 불리며 인기가 높다.
퀸의 멤버들은 1978년 음반 녹음을 위해 몽트뢰 스튜디오를 찾았다가 호숫가의 수려한 풍광과 첨단 녹음 시설에 반했다고 한다. 이듬해 이 스튜디오가 매물로 나오자 퀸은 아예 구입했다. 현재 이 스튜디오는 ‘퀸 박물관(Queen: The Studio Experience)’이 됐다. 머큐리가 1991년 숨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사했던 종이와 멤버들이 연주하던 기타와 드럼, 키보드 등이 전시돼 있다.
프레디 동상에서 호숫가를 따라 약 40분 걸어가면 레만 호반에 그림처럼 떠 있는 시용성(城)이 나온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서 공주가 사랑한 에릭 왕자가 사는 성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시용성은 12∼16세기 사보이아 왕가의 무기고 겸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하 동굴에는 종교개혁 운동가인 프랑수아 보니바르가 1530년부터 6년간 쇠사슬로 기둥에 묶인 채 투옥되기도 했다. 영국 출신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1778∼1824)은 서사시 ‘시용성의 죄수’에서 “쇠사슬에도 묶일 수 없는 영원한 정신, 자유여! 너는 지하 감옥에서도 환히 밝도다”라고 노래했다. 바이런의 시 덕분에 시용성은 세계인들에게 문학의 성지로 더 널리 알려졌다.
지하 동굴에는 와인을 저장하는 40여 개의 오크통이 보관돼 있다. 레반호 언덕 위에 있는 라보 포도밭에서 재배된 포도를 이용해 ‘클로 드 시용(Clos de Chillon)’ 자체 레이블을 단 와인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보 지구는 몽트뢰에서 로잔까지 레만호 북쪽 호숫가를 따라서 약 30km에 걸쳐 있는 계단식 포도밭이다. 총면적은 약 830ha(헥타르)에 이른다. 2007년 9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스위스 관광청에서 추천하는 13개 하이킹 코스 중 하나로 꼽힌 트레킹 성지다.
동쪽 뤼트리에서 서쪽 생사포랭까지 3∼4시간 걷다 보면 레만호를 배경으로 한 포도밭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알프스 산맥의 청정 환경에서 생산되는 스위스 와인은 세계적 명품 와인으로 꼽히지만,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땅이 좁아 와인 생산량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대부분 스위스 내에서 소비해 수출하지 않기 때문. 그래서 스위스를 여행할 때는 현지에서 꼭 맛봐야 할 것이 스위스 와인이다.
라보 지구의 포도밭을 걷다가 도멘 보비와 비노라마 등의 와이너리에 들러 와인을 시음해 보았다. 이 지역은 화이트 와인이 유명한데, 스위스에서만 재배되는 ‘플랜트 로버트’ 품종 같은 레드와인은 부르고뉴 와인처럼 맑고 깨끗하면서도 묵직한 보디감과 향을 느낄 수 있다.
● 로잔에서 유람선 타고 에비앙으로
국제기구가 많은 제네바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로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올림픽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올림픽 경기의 역사를 알게 해주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 올해 여름 2024 파리 올림픽에도 올림픽 기념물 수집팀을 파견했다고 한다.
올림픽 박물관에서 대한민국의 흔적을 찾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다. 입구에서 오르는 계단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성화 봉송 최종 주자였던 정선만, 김원탁, 손미정 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이 새겨진 계단에는 김연아의 이름이 선명하다. 또한 서울 올림픽 당시 색동마크와 오륜기가 그려진 티셔츠,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여자 하키 남북한 단일팀 유니폼도 눈길을 끈다.
로잔 올림픽 박물관은 레만호의 멋진 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현지인들의 웨딩사진 촬영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특히 박물관 꼭대기 층에 자리 잡은 ‘톰 카페’는 로잔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테라스 석으로 꼽힌다. 레만호와 알프스의 화려한 풍경을 바라보며 브런치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레만호는 유람선을 타고 곳곳을 여행할 수도 있다. 로잔의 우시 선착장에서 유람선(CGN)을 타고 30분 만에 프랑스 에비앙레뱅에 다녀오는 코스도 그중 하나. 에비앙 선착장에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에비앙 생수의 수원지를 찾아갈 수 있다. 분홍빛 타일로 장식된 ‘카샤의 샘물(Cachat Spring)’이다. 18세기 후반 이곳에 정원을 소유하고 있던 가브리엘 카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오베르뉴에서 온 라이제르 후작이 카샤의 집에 2년간 머물면서 이 샘물을 매일 마셨다고 한다. 그는 신장과 간이 안 좋았는데, 이 샘물을 마시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카샤는 1826년 샘터에 수치료 센터를 세웠고, 훗날 에비앙 생수 회사가 됐다. 카샤가 수치료 시설 겸 호텔로 지은 건물은 현재 에비앙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선 에비앙 생수병 라벨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생수를 기념품(2유로)으로 살 수 있다.
● 초콜릿의 나라 스위스
스위스는 초콜릿의 나라다. 스위스의 1인당 연간 초콜릿 소비량(2021년 기준)은 11.6kg으로 세계 1위다. 2위 미국(9kg)과 격차가 꽤 크다. 벨기에 초콜릿이 코코아 함량이 높은 다크 초콜릿이 주라면, 스위스 초콜릿은 밀크 초콜릿이 유명하다. 알프스의 넓은 초원에서 신선하게 짜낸 우유가 스위스 초콜릿을 부드럽고 크리미하게 만든다고 한다.
치즈의 고장으로 유명한 그뤼에르 옆 브로크에서는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밀크 초콜릿을 만든 ‘라 메종 카예(La Maison Cailler)’를 방문할 수 있다. 카예는 1875년 세계 최초로 우유와 초콜릿을 결합시켜 밀크 초콜릿을 개발했다.
쌉싸름한 초콜릿에 우유를 섞어 부드러운 맛을 내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우유의 수분 때문에 발생하는 곰팡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당시 기술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가루형 분유를 개발해 신생아들을 살린 네슬레의 기술이 합쳐지면서 밀크 초콜릿을 개발할 수 있었다. 라 메종 카예에서는 직접 초콜릿을 만드는 워크숍에 참여할 수 있고, 초콜릿도 맘껏 시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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