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蘇軾·1037∼1101)은 황주(黃州) 유배 시절인 임술년(1082년) 가을 적벽강(赤壁江)에서 뱃놀이를 한 뒤 ‘적벽부(赤壁賦)’를 남겼다. 조선시대 박은(朴誾·1479∼1504)은 임술년(1502년)이 돌아오자 이행(李荇), 남곤(南袞)과 함께 한강에서 소식의 뱃놀이를 재연하곤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이 썼다.
시인 일행은 마포에서 출발하여 양화나루 잠두봉(蠶頭峯) 아래에서 뱃놀이를 즐겼는데, 이때의 일을 ‘잠두록(蠶頭錄)’에 기록했다. 이날 남곤은 흥이 올라 관(冠)도 벗어버리고 술을 마시며 소식의 ‘적벽부’를 쓰기도 했다. 시인은 돌아온 뒤 지난 뱃놀이를 떠올리며 인생의 무상함에 서글퍼하면서도 공허감에 매몰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즐기자고 다짐했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2022년)에서도 리나 베르트뮐러 감독의 ‘귀부인과 승무원’(1974년)의 뱃놀이 상황을 재연한다. 영화에선 돈과 인기만을 좇는 모델 커플이 협찬을 받아 호화 유람선에 승선하여 재벌들과 선상 파티를 즐긴다.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극인 이 영화에서 공산주의자 선장과 자본주의자 재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귀부인과 승무원’의 설정을 계승한 것이다. ‘귀부인과 승무원’에서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유람선 위에서 펼쳐진다. 또 ‘슬픔의 삼각형’에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자들과 그들에게 시달리는 승무원들의 관계는, ‘귀부인과 승무원’에서의 부유한 상류층 여성과 가난한 선원 간의 계급 갈등을 연상시킨다. 시인 역시 소식의 적벽 뱃놀이를 재연하는 동시에 ‘적벽부’의 설정을 계승하여 인생의 허무에 어떻게 대처할까를 고민했다.
소식은 ‘적벽부’에서 짧고 초라한 삶을 탄식하는 객에게 무상감으로 우울해하기보다 조물주가 우리에게 허용한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기를 권했다. 뱃놀이가 영화에선 부도덕한 배금주의와 불공평한 계급관계를 드러냈다면, 한시에선 인생의 허무를 자각하고 극복하기 위한 계기로 활용되었다. 소식의 적벽 뱃놀이는 유독 조선시대 지식인들에 의해 많이 재연되었다. 시인이 소식의 뱃놀이를 본뜬 것엔 인생의 허무를 자각하고 어떻게 대처할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