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만 믿고 살 수 있나요, 각자의 방식대로 선택해야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10일 03시 00분


오페라 ‘운명의 힘’ 연출한 이회수
거부못할 운명, 선택 관점서 해석
대전예술의전당이 제작하고 공연

대전예술의전당 제작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을 연출하는 이회수는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작품 속 운명을 해석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회수 연출가 제공
대전예술의전당 제작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을 연출하는 이회수는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작품 속 운명을 해석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회수 연출가 제공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도 인간은 각자의 방향을 가지고 선택을 하죠. 그런 ‘선택’의 관점에서 운명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오페라 연출가 이회수가 대전예술의전당이 제작한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연출에 나선다. 10월 16~19일 공연되는 이 작품은 베르디가 완숙기인 49세 때(1862년) 발표한 오페라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휘말린 세 남녀의 비극을 그렸다. 이회수는 이탈리아 로마 국립예술원에서 무대디자인과 연출을 전공했고 한국과 유럽에서 수십 편의 오페라를 연출했다. 2013년 대한민국 오페라대상에서 창작부분 ‘손양원’으로 작품대상과 연출대상을 최연소 수상했다.

“이 작품을 의뢰받고 나서 ‘과연 나는 운명을 믿나’라고 자문해봤어요.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짜여진 운명을 믿고 그대로만 살아간다면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페라에서 여주인공 레오노라의 연인인 돈 알바로는 바닥에 떨어뜨린 권총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바람에 레오노라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다. 레오노라의 오빠인 돈 카를로는 복수를 위해 돈 알바로를 찾아다니다가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우연히 위기에 처한 돈 카를로를 구해주게 된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는데….

“운명에 대해 생각하던 중 신화 속의 시지프스가 생각났어요. 신의 노여움을 사서 계속 바위를 굴려 올리지만 다시 굴러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하죠. 작가 카뮈도 ‘시지프스의 선택’에서 부조리 속의 반항을 표현했지만 우리도 부조리 속에서 어떤 선택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기쁘게 자신만의 방향성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회수 연출가 제공
이회수 연출가 제공

‘운명의 힘’의 이탈리아어 원제는 ‘La forza del destino’다. “영어로 ‘운명’을 표현할 때 ‘fate’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 ‘destiny’는 자기가 선택한 결과에 대한 운명에 가깝죠. 저는 방향성을 가진 ‘destiny’로 운명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처음 작품을 바라볼 때는 극에 묘사된 인물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알바로는 ‘이건 운명이다’라며 피해 다니기만 했을까. 왜 카를로는 다른 일에 앞서 원수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자기 동생까지 죽이게 될까. 레오노라도 왜 알바로를 잊지 못하고 수녀원에 들어갔을까. 어떤 면에서는 한심하게 보였죠. 연습을 시작하면서 강조하는 부분이 ‘주인공들이 한심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표현해 이들의 행동이 관객에게 합리적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 방향성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주인공들은 구체적으로 무대 위에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까. 그는 극이 대략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고 말했다. 시지프스적인 부분, 인간이 신의 뜻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종교적인 부분(교회), 전쟁 부분이다. “견고한 듯하면서 무너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했지만, 인간이 가장 소중하고 빛나게 가져온 것이 신앙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표현한 교회는 온전하지 않은, 허물어진 모습이에요. 하지만 회전 무대를 돌렸을 때 교회안의 모습은 빛나고 화려한 모습이 되죠.”

오페라 ‘운명의 힘’에서 가장 알려진 부분은 극적 긴박감이 넘치는 서곡과 레오노라가 신에게 간구하는 아리아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다. 극의 하이라이트와는 엇갈린다. 연출 면에서 어떻게 음악과 함께 극의 긴장을 쌓아나가게 될까.

“이 오페라는 길죠. 끊임없이 재미를 주는 부분들이 이어지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알바로의 아리아를 통해서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부분을 감성적인 면으로 집중시켜 긴장감을 만들려 해요. 카를로의 경우는 자신의 원수를 알 수 있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 ‘이 속에 내 운명이 있다’는 아리아를 부릅니다. 열지 말지 오랜 시간 고민을 하는 거죠. 전쟁터라는 특수한 상황, 상대가 동료 아니면 적이 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빠르게 믿음을 주거나 돌아서야 하는 감정을 잘 표현해보려 합니다.”

그는 특정 부분을 하이라이트로 강조하기 보다는 중창이 표현하는 대립 등 각각의 부분을 잘 연결시킬 때 이 오페라가 힘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 곡은 사람이 숨 쉴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아요. 오케스트라가 전체 합주로 휘몰아치는 부분은 삶의 역경을 표현하는 것 같고, 아리아들을 보면 그 속에서 인간이 한없이 작아 보이고 그들의 좌절이 연약하게 드러나지만 좌절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는 긍정적인 자세들을 베르디가 잘 그려냈기에 그 모두를 다 잘 표현해내려 하고 있습니다.”연출가 이회수 자신에 대한 부분으로 질문을 옮겨보았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이탈리아에 성악 전공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연출로 삶의 방향을 옮겼다. 운명의 힘이었을까. ‘기쁘게 방향성을 가지고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일찍 유학을 갔고 조급한 마음에 ‘빨리 큰 성악가가 될 거야’만 생각했죠.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고, 지쳤던 것 같아요. 오페라를 자주 보면서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는 시간이 있었죠. 무대 디자인도 전공했거든요. 조금씩 무대 위부터 아래, 옆까지 전체가 보이기 시작했고, ‘저기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라며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 같아요.” 그는 “연출가가 되는 과정에 드라마 같은 일은 없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를 괴롭힐만한 질문을 던져봤다. 그가 연출한 수많은 작품을 관통하는, ‘이회수표 연출 특징’ 같은 것이 있을까.

“저는 뭔가 이론이나 사상, 관념을 작품에 대입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관념을 상징화해서 무대에 입혀야 하죠. 조명 같은 걸 쓰는 데는 겁이 없는 것 같아요. 전환을 길게 끌어가기 보다는 빨리 컬러를 변화시키고, 얼마간 뮤지컬스럽기도 한 것 같고. 어쩌면 ‘과감한 조명과 상징적인 무대’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계획 중인 일을 묻자 그는 치마로사의 오페라 ‘교회 지휘자’를 직접 번안 각색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술 교육에 관심이 많아요. 어린이들이 예술 작품에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고 늘 얘기하죠. 큰 작품은 아니지만 지속적인 교육 사업으로 뿌리를 내려야 하겠다는 생각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대전예술의전당이 제작해 10월 16~19일 공연하는 베르디 ‘운명의 힘’은 여주인공 레오노라 역에 소프라노 조선형 정소영, 그의 연인 돈 알바로 역에 테너 국윤종 박성규, 그의 원수이자 레오노라의 오빠인 돈 카를로 역에 바리톤 길경호 김광현이 출연한다. 홍석원 부산시향 예술감독이 지휘하고 한경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는다.
#오페라#운명의 힘#베르디 오페라#오페라 연출가#이회수#대전예술의전당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