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서남부 발레주에 있는 체르마트는 해발고도 1620m에 있는 산골 리조트마을이다. 마을 주변에는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계절 눈덮인 마터호른(4478m)이 거인처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을이 오는 알프스를 트레킹할 수 있는 최적의 출발 장소이자 베이스캠프다.
스위스 알프스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트레킹이다. 천천히 걸으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의 워낭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알프스 산에서는 방목하는 소들이 어디로 가는지 쉽게 알기 위해 방울을 채운다. 가을이 되면 눈이 내리기 전에 산 위에서 방목했던 소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체르마트 마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수고했던 목동들을 위로하는 ‘목동축제(Shepherd Festival)’가 열린다. 알프스 등반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체르마트 마을에는 가을을 맞아 클래식 음악회와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체르마트에서 유명한 트레킹 코스는 3곳이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해발 3883m)인 ‘마테호른 빙하 파라다이스’에 올라가 빙하 트레일을 즐기거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리펠호수까지 걷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기 있는 코스는 수네가 전망대로 올라가 5개 산정호수를 찾아다니는 트레킹이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 쓰인 마테호른 봉우리가 수정처럼 맑은 호수에 비친 모습은 알프스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체르마트 5대 호수 트레킹(5 lakes Trekking)을 위해 케이블 철도를 탔다. 땅속 터널을 45도 각도로 상승하는 철도를 타니 10분 만에 ‘수네가 파라다이스’(2288m)역에 도착했다. 마테호른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테라스다. 그런데…. 비와 구름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고민을 했다. 비오는 날씨에 트레킹을 해? 말어? 옆에서 감자칩에 맥주를 마시고 있던 네덜란드 여행객이 어제 맑은 날씨에 트레킹한 사진을 보여준다. 순간 부러움이 부글부글. 그래 일단 출발하자! 마테호른을 볼 수 없다하더라도, 대자연의 품에 안겨 걷는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리라.
다시 곤돌라를 타고 블라우헤르트(2571m)까지 올라간다. 길목마다 5개 호수 트레킹을 알리는 노란색 표지판이 있어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드디어 첫 번째 호수인 슈텔리제(Stellisee)가 나타났다. 수많은 초콜릿 광고에서 마테호른을 비추는 포토제닉한 사진으로 유명한 전설의 호수다. 그런데 구름낀 날씨 탓에 하늘도 호수도 모두 곰탕이다.
거의 1시간을 기다렸을가. 아무래도 구름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 다음 호수로 출발했다. 알프스 3000~4000미터급 준봉들 사이로 쉴새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들이 폭포수처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눈 앞에서 살아움직이는 듯한 장면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제색도의 ‘제(霽)’는 비나 눈이 그친 후 날씨가 쾌청해진다는 뜻. 온종일 비가 내린 후 습기 머금은 산이 더욱 청명해보이는 느낌이다. 한참 걷고 있는데 드디어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이어서 거인같은 마테호른이 두둥! ‘마터호른제색도’가 진짜로 눈 앞에 펼쳐졌다.
언젠가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도 그랬다. 잔뜩 내려앉은 비구름에 싸여 천지는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고, 기도하길 30분이 지났을까. 그 정성에 감동을 받았는지, 구름이 서서히 열리고 천지가 개벽했다. 처음부터 맑은 날씨에 만나는 천지보다, 구름 속에서 한꺼풀씩 벗겨지며 나타나는 천지는 더 신비스러운 모습이었다. 알프스에서구름을 뚫고 신선처럼 나타난 마터호른은 좌선하고 있는 미륵불처럼 보였다.
슈텔리제에 비친 마터호른.마터호른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나났다. 슈텔리제로 돌아가자! 호수에 비친 마테호른을 찍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언제 다시 구름에 갇힐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해발 2500미터 가량의 산길에서 오르막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공기 중 산소가 부족해 숨이 턱턱 차올랐다.
수네가 파라다이스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는 이 호수에서도 마테호른이 비치지 않는가. 굳이 3시간을 걷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지만, 알프스 구름 속의 산책의 경험은 다시 얻기 어려우리라.
마테호른은 알프스 4000m급 고봉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등정됐을 만큼 난공불락의 봉우리였다고 한다. 8년 동안 15개 팀이 마테호른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865년 7월14일. 영국 등반가 에드워드 윔퍼의 등반팀이 마테호른을 세계 최초로 정복하면서 체르마트는 알프스 등반의 베이스캠프 리조트 마을로 유명해졌다.
체르마트 시내 생모리스 교구 주교좌 성당 앞에는 마테호른 박물관이 있다. 마테호른 등반과 관련된 수많은 컬렉션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윔퍼 등반팀이 사용했던 끊어진 로프다. 당시 등반대는 하신길에 낙석에 맞아 7명을 묶은 로프가 끊어지면서, 4명이 1000m 아래 빙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던 슬픈 사연을 담은 유물이다.
체르마트 시내를 흐르는 빙하천 다리 위에서 마테호른 봉우리를 바라보는 관광객들. 체르마트 숙소에서 머물 때 가장 매력적인 곳은 바로 베란다다. 시내 어느 곳에서도 4478m급 마테호른 봉우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해질녘 베란다에 앉아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체르마트 맥주(Zermatt Bier)를 한잔했다.
소가 풀을 다 뜯어먹어서일까? 그렇다고 저렇게 깔끔할 수 있을까. 자세히 보니 커다란 풀깎는 기계가 경사진 산비탈을 다니고 있었다. 깎은 풀더미는 겨울철 소들의 사료로 쓰기 위해 트럭에 실려 보관창고로 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스위스의 경관을 중요시하는 농업은, 주민과 공무원의 철저한 관리 속에 이뤄지는 ‘관광인프라’이기도 하다.
케이블카 역 뒷편 계단을 오르면 두개의 산봉우리를 잇는 강철 현수교인 ‘티쏘 피크 워크(Peak Walk by Tissot)’가 있다. 길이 107m, 너비 80cm의 출렁다리를 걷다보면, 알프산를 넘어오는 바람에 온 몸이 흔들린다. 거센 바람에 날아갈까봐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힘들다.
실제로 걸어본 빙하 평원의 곳곳에는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도랑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수천만년 동안 녹지 않는 빙하지대로 유명했던 ‘글래시어 3000’의 얼음도 기후변화로 거의 다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빙하 끝까지 다녀오는 2시간 코스를 완주하려면 방수가 되는 튼튼한 등산화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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