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마터호른제색도’[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12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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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서남부 발레주에 있는 체르마트는 해발고도 1620m에 있는 산골 리조트마을이다. 마을 주변에는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계절 눈덮인 마터호른(4478m)이 거인처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을이 오는 알프스를 트레킹할 수 있는 최적의 출발 장소이자 베이스캠프다.


수네가 5대호수 트레킹

스위스 알프스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트레킹이다. 천천히 걸으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의 워낭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알프스 산에서는 방목하는 소들이 어디로 가는지 쉽게 알기 위해 방울을 채운다. 가을이 되면 눈이 내리기 전에 산 위에서 방목했던 소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체르마트 마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수고했던 목동들을 위로하는 ‘목동축제(Shepherd Festival)’가 열린다. 알프스 등반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체르마트 마을에는 가을을 맞아 클래식 음악회와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체르마트에서 유명한 트레킹 코스는 3곳이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해발 3883m)인 ‘마테호른 빙하 파라다이스’에 올라가 빙하 트레일을 즐기거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리펠호수까지 걷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기 있는 코스는 수네가 전망대로 올라가 5개 산정호수를 찾아다니는 트레킹이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 쓰인 마테호른 봉우리가 수정처럼 맑은 호수에 비친 모습은 알프스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체르마트 5대 호수 트레킹(5 lakes Trekking)을 위해 케이블 철도를 탔다. 땅속 터널을 45도 각도로 상승하는 철도를 타니 10분 만에 ‘수네가 파라다이스’(2288m)역에 도착했다. 마테호른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테라스다. 그런데…. 비와 구름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고민을 했다. 비오는 날씨에 트레킹을 해? 말어? 옆에서 감자칩에 맥주를 마시고 있던 네덜란드 여행객이 어제 맑은 날씨에 트레킹한 사진을 보여준다. 순간 부러움이 부글부글. 그래 일단 출발하자! 마테호른을 볼 수 없다하더라도, 대자연의 품에 안겨 걷는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리라.

다시 곤돌라를 타고 블라우헤르트(2571m)까지 올라간다. 길목마다 5개 호수 트레킹을 알리는 노란색 표지판이 있어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드디어 첫 번째 호수인 슈텔리제(Stellisee)가 나타났다. 수많은 초콜릿 광고에서 마테호른을 비추는 포토제닉한 사진으로 유명한 전설의 호수다. 그런데 구름낀 날씨 탓에 하늘도 호수도 모두 곰탕이다.

거의 1시간을 기다렸을가. 아무래도 구름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 다음 호수로 출발했다. 알프스 3000~4000미터급 준봉들 사이로 쉴새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들이 폭포수처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눈 앞에서 살아움직이는 듯한 장면이다.

알프스 봉우리 사이로 흘러다니는 구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제색도의 ‘제(霽)’는 비나 눈이 그친 후 날씨가 쾌청해진다는 뜻. 온종일 비가 내린 후 습기 머금은 산이 더욱 청명해보이는 느낌이다. 한참 걷고 있는데 드디어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이어서 거인같은 마테호른이 두둥! ‘마터호른제색도’가 진짜로 눈 앞에 펼쳐졌다.

언젠가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도 그랬다. 잔뜩 내려앉은 비구름에 싸여 천지는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고, 기도하길 30분이 지났을까. 그 정성에 감동을 받았는지, 구름이 서서히 열리고 천지가 개벽했다. 처음부터 맑은 날씨에 만나는 천지보다, 구름 속에서 한꺼풀씩 벗겨지며 나타나는 천지는 더 신비스러운 모습이었다. 알프스에서구름을 뚫고 신선처럼 나타난 마터호른은 좌선하고 있는 미륵불처럼 보였다.

슈텔리제에 비친 마터호른.
마터호른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나났다. 슈텔리제로 돌아가자! 호수에 비친 마테호른을 찍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언제 다시 구름에 갇힐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해발 2500미터 가량의 산길에서 오르막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공기 중 산소가 부족해 숨이 턱턱 차올랐다.

호수로 돌아오니 드디어 보였다. 크리스탈처럼 맑은 호수에 마터호른이 장엄하게 담겨 있었다. 거의 2시간을 기다린 끝의 만남. 날이 흐려 흑백사진같은 느낌이 깊은 침묵에 빠져들게 했다.

야생화가 피어 있는 알프스의 구름 속을 부지런히 걷다보니 그린지 호수(2334m), 그륀호수(2300m), 에머랄드빛 모스예 호수(2148m)가 나타났다.

에머랄드빛 모스예 호수.
마지막 호수 라이호수(2232m)에 도착해 바위에 걸터 앉아 쉬었다.

수네가 파라다이스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는 이 호수에서도 마테호른이 비치지 않는가.
굳이 3시간을 걷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지만, 알프스 구름 속의 산책의 경험은 다시 얻기 어려우리라.

마테호른은 알프스 4000m급 고봉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등정됐을 만큼 난공불락의 봉우리였다고 한다. 8년 동안 15개 팀이 마테호른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865년 7월14일. 영국 등반가 에드워드 윔퍼의 등반팀이 마테호른을 세계 최초로 정복하면서 체르마트는 알프스 등반의 베이스캠프 리조트 마을로 유명해졌다.

체르마트 시내 생모리스 교구 주교좌 성당 앞에는 마테호른 박물관이 있다. 마테호른 등반과 관련된 수많은 컬렉션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윔퍼 등반팀이 사용했던 끊어진 로프다. 당시 등반대는 하신길에 낙석에 맞아 7명을 묶은 로프가 끊어지면서, 4명이 1000m 아래 빙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던 슬픈 사연을 담은 유물이다.

체르마트 시내에 있는 마테호른 박물관.
알프스 환경보호를 위해 체르마트에는 자동차가 처음 발명된 1885년 이래 자동차의 진입이 허락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신 1988년 최초의 마을 내 공공 전기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그래서 체르마트에 방문할 경우 렌터카는 5km 떨어진 아랫마을 태쉬(Täsch)에 주차를 하고, 12분이 소요되는 산악열차를 타고 와야 한다.

체르마트 시내를 흐르는 빙하천 다리 위에서 마테호른 봉우리를 바라보는 관광객들.

체르마트 숙소에서 머물 때 가장 매력적인 곳은 바로 베란다다. 시내 어느 곳에서도 4478m급 마테호른 봉우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해질녘 베란다에 앉아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체르마트 맥주(Zermatt Bier)를 한잔했다.


해가 저물며 빛에 따라, 바람과 구름에 따라 변화하는 마테호른의 모습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야구 축구 생중계보다도 더 흥미진진했다.


●골든패스 산악열차타고 빙하 트레킹

알프스를 즐기는 또하나의 방법은 산악열차 여행이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열차는 지붕까지 이어지는 넓은 유리창을 갖췄다. 열차가 달리면 알프스의 봉우리와 호수, 초록빛 들판, 전나무 숲 속에 지어진 샬레(스위스 전통가옥)가 3D 입체화면으로 다가온다.


몽트뢰에서 인터라켄 오스트까지 이어지는 3시간 여 구간의 ‘골든패스(GoldenPass)’ 파노라마 열차. 레만호부터 베르네제 알프스의 황금빛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산악기차 여행이다.


열차를 타면서 한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스위스 산 속의 초원은 어떻게 그렇게 깨끗해보일까? 우리나라 같으면 잡초도 우거지고, 억새가 흔들리고, 잡목과 넝쿨도 우거져 있을텐데. 스위스 산 속 들판은 잔디를 심어놓은 골프장의 페어웨이처럼 산뜻하다.


소가 풀을 다 뜯어먹어서일까? 그렇다고 저렇게 깔끔할 수 있을까. 자세히 보니 커다란 풀깎는 기계가 경사진 산비탈을 다니고 있었다. 깎은 풀더미는 겨울철 소들의 사료로 쓰기 위해 트럭에 실려 보관창고로 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스위스의 경관을 중요시하는 농업은, 주민과 공무원의 철저한 관리 속에 이뤄지는 ‘관광인프라’이기도 하다.


몽트뢰에서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를 타고 약 2시간. 그슈타트역에서 내렸다. 콜 뒤 피용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글래시어(Glacier) 3000’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레만호 지역에 있는 알프스 산으로 빙하 위를 트레킹할 수 있는 명소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도착하니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역에 도착한다. 그는 국내에서도 경기 화성시 남양읍에 지은 ‘남양성모성지대성당’을 설계한 것으로 친숙한 건축가다.


케이블카 역 뒷편 계단을 오르면 두개의 산봉우리를 잇는 강철 현수교인 ‘티쏘 피크 워크(Peak Walk by Tissot)’가 있다. 길이 107m, 너비 80cm의 출렁다리를 걷다보면, 알프산를 넘어오는 바람에 온 몸이 흔들린다. 거센 바람에 날아갈까봐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힘들다.


다리를 건너 전망대에 서니 눈 덮인 24개 이상의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이거, 융프라우, 마테호른, 그랑 콩뱅은 물론 저 멀리 프랑스 몽블랑까지….


전망대 아래쪽 평원에는 빙하가 펼쳐진다. 푸른 하늘색과 하얀 빙하가 어우러지는 색다른 트레킹 코스다. 이 곳 빙하에는 크레바스가 없어서 안전하다.


5월부터 9월까지 ‘알파인 코스터(총 1km)’가 운행되기도 한다. 최대 시속 40km로 질주하며, 520° 회전과 급커브와 웨이브, 6m나 솟구치기도 해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빙하 속 놀이기구다.


실제로 걸어본 빙하 평원의 곳곳에는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도랑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수천만년 동안 녹지 않는 빙하지대로 유명했던 ‘글래시어 3000’의 얼음도 기후변화로 거의 다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빙하 끝까지 다녀오는 2시간 코스를 완주하려면 방수가 되는 튼튼한 등산화가 필요했다.

산 정상 케이블카 역에는 르 카르노제 카페가 있다. 알프스 연봉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산 위에서 마시는 따뜻한 핫초코 한잔은 빙하 바람에 떨었던 몸을 녹여주는 특효약이다.

에비앙 샘물 수원지에서 반려견의 이름을 새긴 생수병.

#스위스#체르마트#트레킹#알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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