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소소칼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22일 11시 03분


H와 알고 지내게 된 건 고3때였다. 건너건너 누군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진 서로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어떤 분야에도 재능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H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친구였다. 모의고사건 내신이건 국어를 제외하곤 H가 미끄러진 과목이라야 1등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수학은 H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H에게는 내게 없는 것들이 있었다. H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얬다. 나는 작고 까맸다. 톡 튀어나온 하얀 이마가 그 애의 새침한 눈매와 입매를 무게감 있게 받쳐 줬다. 까만 머릿결을 이마에서부터 뒤통수까지 쓸어 넘기는 H의 습관은 어렸던 내 마음 속 정체 모를 동경을 매번 일렁이게 했다. 난 안 그래도 체구가 작은데 이마까지 좁고 납작해서 누구보다 소심하고 옹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금은 노화로 인해 눈썹이 쳐지며 그나마 봐 줄 만한 인상이 되었다. 세월이 우리에게 똥만 주지는 않는다.

난 지금도 무엇이든 게임이라면 잘 못하는데, H는 게임을 참 좋아하고 잘했다. 당시 우리 반에서는 복잡한 주차장에 갇힌 차량을 요리조리 움직여 빼내는 모바일 게임이 유행했었다. 아무리 어려운 스테이지라도 H가 에어팟 위에서 손가락을 몇 번 튕기면 구석에 처박혀 있던 차량이 용케도 빠져나오곤 했다. ‘앵그리버드’를 하면 H의 새가 언제나 가장 멀리, 오래 날았다. 테트리스로 치면 H는 은밀한 단정함으로 기반을 다지다 결정적인 순간 한쪽 구석에 ‘I’ 블록을 꽂아 넣어 판을 뒤집는 ‘교실 구석 페이커’였다.

당연히 나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갈 거라 생각했던 H는 이름도 처음 듣는 지방대에 갔다. 자기는 항공관제사가 되고 싶은데, 그걸 하려면 그 대학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난 그때 관제사가 뭔지도 몰랐다. 똑똑한 친구라 대학 졸업도 전에 시험에 붙었다. 내가 언론사에 들어가려고 한창 공부할 때 H는 인천을 오가는 전 세계의 비행기를 하나 둘 지휘하기 시작했다. 주차장에 갇힌 차량을 빼내듯, 혼탁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자기가 걸을 가장 분명한 길을 짚어냈던 용기로, H의 손가락은 어김없이 각자가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계류장의 관제탑 옆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

기자 공부를 할 때도, 기자가 되고 나서도 종종 이 생활에 대한 번뇌가 찾아왔다. 지친 하루를 보낸 날이면 H 생각이 났다. 돌이켜 보면 살면서 내가 서 있는 곳이 내 자리라고 느껴졌던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 자리를 알아보는 듯한 H의 초능력이 탐났다. 한번은 술에 취해 H에게 다 말했다. 나는 네가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안 간 게 못내 이상했는데 지금은 네가 꿈도 이루고 너무 잘살고 있는 것 같다고. H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채은아, 나라고 고민이 왜 없겠어. 나는 네가 부러워”

학창 시절 강동원을 좋아했던 H는 일견 꿈을 이뤘다. 우사인 볼트의 속도로 스쳐 지나가며 보면 강동원을 아주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한 외모의 신랑을 얻었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그때나 나는 H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10명 정도 안에는 들어서 H의 결혼식 때 다른 애들 몇몇이랑 축가를 불렀다.

우습게도 내가 제일 먼저 울었다. 첫 번째는 20대의 신부가 좀처럼 선택하지 않는 상체를 모두 가리는 웨딩드레스가 H에게는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곁에서 말똥거리는 강동원의 눈빛이 미치도록 순진무구했던 탓이었다. ‘그’ 강동원은 H의 속눈썹의 길이, 새벽의 체온, 낮잠의 호흡 같은 건 알지 몰라도 앵그리 버드를 날려 보내는 어떤 춤사위에 대해선 알 리가 없었다.

최근에 축가 멤버들과 만난 H는 배가 불러 나타났다. 살은 별로 안 쪘는데 하얀 이마에 트러블이 오돌토돌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만삭의 배에 손을 얹은 상태로 “한번 만져봐도 돼?”하고 예의상 물었다. H는 이미 배를 내맡긴 채로 웃으며 그래그래 만져봐 했다.

“태명이 뭐야?” “튼튼이” “진짜 너처럼 범생이 같이도 지었다” “ㅋㅋㅋ왜” “나 아는 사람 애기는 태명이 ‘한방이’래. 이유는 묻지 않았어….” “H야, 너도 겨드랑이 까매졌어?” “응응 까매지더라” “에이 애기 낳으면 원래대로 돌아온대” “근데… 그거는 진짜야? 빅파이….” “ㅋㅋㅋㅋ난 빅파이까진 안 됐어” “그럼 중파이네” “ㅋㅋㅋ빅 아니고 미디엄 파이구나” “임신하면 무조건 엄청 커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야? 울 엄만 빅파인데 난 건포도거든” “그건 너네 엄마가 원래 큰 거야”…….

아들 배 치고는 작았다. 나는 그게 꼭 테트리스의 판을 뒤집는 I의 부피처럼, 아이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찾았기 때문으로 느껴졌다. H는 옛날보다는 머리를 덜 쓸어 넘기고, 그만큼 자주 자신의 부푼 배를 쓸어 담았다. 그러면 어떤 때는 아기의 발이 만져진다고 했다. 우리가 실없는 농담을 할때, 철없이 맥주잔을 부딪칠 때도 H는 아기를 더듬고 있었다. “우리 오늘 먹은 거 H 아기까지 N빵하자” “좋다 좋다. H야, 너 아기 낳아도 맨날 데리고 나와라. N빵하게” “무슨 소리야, 절대 떼어 놓고 나올 거야”

하얀 이마건, 공부 머리건, 0.001초 강동원이건 닮지 않아도 좋으니 어떤 복잡한 상황에서도 가장 정확한 항로를 그려내는 그 유려함만은 아이가 H를 닮았으면 좋겠다. 엄마의 지혜가, 세상에 태어나 맞닥뜨릴 무수한 번민으로부터 그 아이를 지킬 것이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제목에서 따 왔다. 그녀의 조밀하고 애틋한 문체는 따 오는 데 실패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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