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속에서도 분투하는 이들… 결코 부서지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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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문학 속으로] 왜 한강 문학에 주목해야 하나
정여울 작가(KBS 라디오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고통을 대면하고 아픔을 쓰다듬으며
문학의 이름으로 지켜낸 ‘사람다움’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세계문학사를 뒤흔드는 빛나는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비단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기념비적 사건으로서만이 아니라 한강의 문학작품 자체가 세계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강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 입는 인간’이라는 인류의 공통 화두를 탁월하게 형상화해냈을 뿐 아니라 트라우마 속에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문학의 이름으로 지켜낸 것이다.

작가가 반드시 글로 써야만 비로소 존재하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책으로 읽어야만 비로소 제대로 울려 퍼지며 ‘공명’을 일으키는 이야기의 힘. 나는 문학의 가치가 바로 그곳에 있음을 믿는다. 작가가 글로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만 처절하게, 외롭게 울려 퍼지지 않았을까.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바로 그 문학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눈부신 축복이었다. 한강 작가를 생각하면 남들이 뭐라든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아스라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한 문장 한 문장 쓰고 있는 그 작품 이외에는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는 듯한 한없이 순수한 집중. 작가가 소설 속에서 그려내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바로 그 고요하면서도 초인적인 집중 속에서 태어난다. 한강의 주인공들은 그 무엇에도 타협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고결함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는다.

한강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상처의 한가운데까지 용감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트라우마 속에서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그린다. ‘소년이 온다’에서 열다섯 살 소년 동호는 모두가 집에 가라고 등을 떠미는데도 목숨을 걸고 사람들 곁에 있는다. 1980년 5월 광주, 끝까지 도청을 지켜낸 사람들은 총을 잡고는 있었지만 쏘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그들은 화려한 이념을 지켜낸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의 곁에 끝까지 있어 줌으로써 민주주의 이상의 그 무엇을 지켜냈다. 1980년 광주, 그곳에서 끝까지 싸운 사람들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사람다움’은 무엇인지를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도,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하와 인선도, 자신을 둘러싼 억압적인 환경에 맞서 싸우면서 끝끝내 나다움을, 사람다움을, 인간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맞서서 내가 온 힘을 다해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마침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일을 해낸다.

특히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맞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투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소년이 온다’의 열다섯 살 주인공 동호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생각하지 않고 1980년 광주, 그 뼈아픈 트라우마의 장소를 끝까지 지켜낸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하는 자신도 극심한 통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친구의 안부를 걱정하며 길을 나선다. 경하는 목공 작업 중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 입원한 친구 인선의 새를 돌보기 위해 자신이 조난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눈보라 치는 제주로 향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미약한 개인이 역사를 바꿀 수 있냐고. 어떻게 힘없는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냐고. 하지만 한강의 작품을 읽은 우리 독자들은 안다. 우리가 경험한 모든 순간이 하나하나 중요한 결정일 수 있음을. ‘소년이 온다’의 ‘5·18, 광주’, ‘작별하지 않는다’의 ‘4·3, 제주’, 누구도 고통 없이는 마주할 수 없는 트라우마의 시간을 한강은 끝까지 대면한다. 그들의 상처는 개인의 고립된 상처가 아니라 역사의 트라우마이며 집단적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그 깊은 트라우마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도 아프고 힘들면서 끝내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다.

그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것이 훨씬 쉬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굳이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결코 ‘미약한 개인’이 아님을, 얼마든지 역사의 흐름에 맞서서 싸우고, 타인의 아픔을 쓰다듬고, 마침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존재들임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이 아름다운 문장처럼.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수천의 순간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고통과 기쁨, 슬픔과 사랑이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간직한 채로, 거대한 별자리를 그리며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상태, 이 불가해한 신비로 가득한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임을, 우리는 부디 잊지 말기를.

‘문학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책으로 수업을 할 때마다 내가 가장 대답하기 고통스러운 질문이 하나 있다. “작품이 너무 슬프고 어두워서 못 읽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질문. 그 어려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 한다. 어둠을 견뎌야만 비로소 뚫고 나오는 빛이 있다고. 아름다운 작품에는 항상 그런 빛이 있다. 슬픔을 끝까지 견뎌야만 반드시 깨달아지는 아름다움, 그것이 우리가 문학을 통해 경험하는 눈부신 영혼의 빛이라고. 지금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목이 터져라 외쳐온 우리 작가들은 이번 계기를 통해 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 처음으로 살 수 있게 됐다. 이 반가운 축제의 열기가 부디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한국 문학작품을 번역했다는 번역가들에게도, 악조건 속에서도 누가 뭐라든 ‘내가 사랑하는 책’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편집자들에게도 깊은 감사와 열렬한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한강의 기적은 번역가의 기적, 편집자의 기적, 마침내 독자의 기적이기도 하기에. 마침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나날이, 365일 하루하루 빠짐없이 문학이 필요한 시간으로 변신하는 눈부신 기적이 계속되기를.
#한강 문학 속으로#문학#한강#노벨 문학상#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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