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장편소설 ‘흰’ 작가의 말 중에서첫 달의 적응 기간이 지나자 서울에서 살던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걷는 것, 또 걷는 것- 돌아보면 바르샤바에서 내가 한 일은 그것이 거의 전부였다. 틈이 날 때마다 아파트 주변의 고요한 천변을 산책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로 나가 골목들을 배회했다. 그보다 더 가까운 와지엔키 공원의 숲길을 목적 없이 걸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쓰고 싶었던 『흰』이란 책에 대해, 그렇게 걸으며 생각했다. (중략) 기억한다. 아파트의 열쇠가 하나뿐이어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다섯시에서 다섯시 반까지는 어김없이 집으로 먼저 돌아와 있어야 했다. 그 시간까지 거리를 걸으며 이 책을 생각했다. 무엇인가 떠오르면 길에 선 채로 수첩에 몇 줄씩 적기도 했다. 하나뿐인 침실에서 아이가 곤히 잠든 밤이면 식탁 앞에 앉아, 혹은 거실의 소파침대에 담요를 쓰고 웅크려 앉아 한 줄씩 이어 적어갔다. (중략) 그렇게 그 도시에서 이 책의 1장과 2장을 쓰고, 서울로 돌아와 3장을 마저 썼다. 그다음 일 년 동안은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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