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문학 속으로]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스웨덴 한림원서 가장 비중있게 논평한 작품
시대적 아픔, 개인의 삶에서 깊이있게 녹여내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44∼45쪽)》
한강이 2021년 발표한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유독 눈 내리는 장면이 자주, 그리고 생생히 묘사돼 있다. 소설가인 주인공 경하가 친구 인선의 제주 집을 향해 눈보라가 휘날리는 악천후를 뚫고 가는 장면은 한여름에 읽어도 몸이 시릴 정도. 작품에서 눈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꿈을 잇는 중요한 상징이다. 한강은 2021년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눈은 죽음과 삶 사이, 인간의 어둠과 빛 사이를 가득 채우는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한강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작별’에 이어 눈 3부작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 그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 ‘소년이 온다’를 쓴 후 그 연장선상에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필하면서 계획을 수정했다. 폭력적인 사회에서 희생된 개인의 고통에 이어 ‘사랑’에 대해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 한강은 2022년 펴낸 산문 ‘출간 후에’에서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도 함께 느꼈다고 말하는 바로 그 고통을. 그 생생한 고통은 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걸까? 설마, 그건 사랑인가?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사랑에 대한 다음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썼다.
사실 독자들 사이에서 한강의 소설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극한의 묘사로 인해 완독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가부장제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그린 ‘채식주의자’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그린 ‘소년이 온다’ 등이 특히 그렇다. 이에 비해 ‘작별하지 않는다’는 ‘지극한 사랑’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마따나 한결 순화된(?) 표현 덕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읽힌다. 10일(현지 시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 스웨덴 한림원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당신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겠느냐”는 질문에 한강이 ‘작별하지 않는다’를 추천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한강은 이날 “내 생각에 모든 작가는 자신의 가장 최근 작품을 좋아한다. 제 가장 최근 작품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일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유를 밝히면서 ‘작별하지 않는다’를 가장 비중 있게 논평했다. 한림원은 “1940년대 후반 한국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의 그림자를 들춘다. 압축적이고 정확한 이미지로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집단 망각에 빠진 상태를 드러내려고 끈질기게 시도한다”고 평했다. 또 악몽 같은 이미지, 진실을 말하려는 증언 문학의 사이를 독창적으로 오간다”고 덧붙였다. 한강은 이 작품으로 지난해 11월 프랑스 4대 문학상인 메디치 외국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경하의 꿈 장면으로 시작한다. 눈 내리는 벌판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묘비처럼 심겨진 장면이다. 그런데 갑자기 발아래로 물이 차오르고, 경하는 무덤들이 쓸려 가기 전에 유골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깬다. 경하는 이 꿈이 자신의 전작에서 다룬 학살에 대한 것으로 여기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친구 인선에게 이를 털어놓는다. 이에 인선과 함께 꿈과 연관된 영상을 제작하기로 하지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닥쳐 수년간 일이 진척되지 못한다.
그러던 겨울 어느 날, 경하는 목공 작업 도중 손가락이 잘려 병원에 실려간 인선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자신의 제주 집에 내려가서 혼자 남은 ‘새’를 구해달라는 것. 그 길로 제주로 향한 경하는 폭설에 휩싸여 눈길을 오르다 길을 잃고 어둠에 갇힌다. 겨우 도착한 인선의 집에서 경하는 70년 전 민간인 학살에 얽힌 인선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접한다.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어린 시절 부모와 동생을 한꺼번에 잃고 오빠마저 행방불명이 된 것.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87쪽)
그 열세 살 아이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오빠의 행적을 쫓으며 끝까지 사람과 삶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다. 빛과 어두움 사이를 가르며 느릿하게 떨어지는 눈송이 속에서 떠나간 자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 정심으로부터 인선에게로, 인선으로부터 경하에게로 스며든다. 이 작품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한 한강의 말을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강은 메디치상 수상 소감에서 “제가 닿고 싶은 마음이 끝없는 사랑, 작별하지 않는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작품 제목에도 이런 작가의 각오가 담겼다. 한강은 출간 간담회에서 “어떤 것도 종결하지 않겠다는, 그것이 사랑이든 애도든 끝내지 않고 끝까지 껴안고 계속 나아가겠다는 결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작품 속 세 주인공 경하, 인선, 정심은 모두 통증을 겪는다. 경하는 위경련과 편두통으로 시달리며, 인선은 손가락 절단 사고 이후 회복을 위해 3분에 한 번씩 봉합 부위를 바늘로 찌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정심은 계속되는 학살의 악몽을 잊기 위해 전기요 밑에 실톱을 깔고 잔다. 이들에게 통증은 죽은 자를 기억하고,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통과의례다. 그렇기에 이들은 고통을 끌어안고 삶을 지속하기로 한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따르지만 죽음 대신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인선)이기 때문이리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