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리며 나는 또다시 귀신 얘기 책을 읽었다. 귀신 얘기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동양의 귀신 얘기는 역사,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양 귀신은 사회적 트라우마부터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세계와 우주에 대한 철학까지 다양한 관점을 표상한다. ‘귀매’도 그런 이야기다. 유은지 작가가 이공계 대학생에서 민속학자로 진로를 바꾼 계기가 된 운명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귀매’는 아주 잘 쓴 민속신앙 액션 스릴러다. 스릴러의 중심은 음모와 이에 맞서는 주인공의 대결이다. 이러한 구도는 초반부의 다음과 같은 복선에서 드러난다.
‘이건 분명히 귀매야. 이렇게 강한 귀매는 처음 봐.’(22쪽)
이 작품에서는 귀신을 볼 수 있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 혜린이 귀매에 맞서 대결을 펼친다. 대결의 배경에는 역사의 질곡과 이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려는 악당 가문의 음모가 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귀매(鬼魅)’는 ‘도깨비와 두억시니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한때 살아 있다가 죽어서 육신이 사라지고 혼만 남은 존재가 아니라, 애초에 살아 있었던 적이 없는, 처음부터 이승에 속하지 않는 요괴를 이르는 한국 민속문화적 개념이다.
한을 풀어주거나 달래서 저승으로 떠나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보니, 예상을 빗나가는 상황도 끊임없이 벌어진다. 혜린은 손에 넣을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해서 그때그때 대응해야 한다. 이것은 스릴러의 중요한 특징이다. 미국의 대중문화학자 제리 파머에 따르면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최첨단 도구를 활용해 임기응변으로 맞서는 장면들이 스릴러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장르 특성이다. 파머는 주로 ‘007 시리즈’ 같은 첩보 스릴러를 논하기 때문에 최첨단 기술과 장비가 등장한다. ‘귀매’에서 혜린은 단검과 정령 등 고전적인 보호 장치부터 호텔에서 일반 고객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문을 막은 빨간 밧줄까지 활용하여 귀매에 맞선다.
자꾸 장르 특징을 들먹이는 이유는 스릴러나 호러 같은 장르문학은 기존의 장르 공식을 얼마나 따르면서 새로운 요소들을 어떻게 접목시키는지가 작품의 신선함과 흡인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주요 무대는 부산 다대동인데, 작가는 이 지역 풍습, 도깨비 고사, 만신들이 읊는 주문 등 한국 민속문화부터 인도 신화까지 폭넓고 깊이 있는 자료를 활용해 신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귀매와의 대결이 역사적 상흔과 연결되는 후반부는 1000만 영화 ‘파묘’를 연상시킨다.
주지할 점은 작가가 약관의 나이에 ‘귀매’를 처음 출간한 것이 ‘파묘’가 개봉하기 20년 전인 2004년이라는 사실이다.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민속학 분야의 풍부한 자료 조사와 이를 매끄럽게 이야기 안에 융합시키는 구성력,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 필력 모두 엄청난 작품이다. 작가의 첫 작품이자 첫 장편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바탕에는 귀매라는 소재를 통해 한국의 역사, 문화, 민속, 나아가 한국적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탄탄한 역사의식이 깔려 있다. 언젠가 ‘귀매’도 영화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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