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은어, 속어죠.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나의 정신적 아버지.’ ‘큰 어르신’, ‘멘토’….
어디가서 누구를 내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에 빗대 소개하거나 온갖 수식어를 써가면서 자랑하기 쉽지 않다. 정신적 아버지라고? 정말 생물학적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신데, 이런 얘기하면 불효자 소리 듣기 십상일테다. 정말 존경한다는 어르신이라도 이런 표현 쓰기 어렵다.
탤런트 이광기(56).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드라마 〈태조 왕건〉, 〈야인시대〉, 〈정도전〉, 〈태종 이방원〉에서의 인상적인 연기로 이름을 알려 큰 사랑을 받는 배우인 건 누구나 다 안다. 연기하는 것 말고도 예술인으로 재주도 많고, 연예인 티 안 내면서 참 열심히 살고, 가진 것 잘 베풀고 봉사 자주 해서 주변에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은 것도 누구나 안다.
그런데 이광기가 아버지급으로 모시고 지낸다는 분은 들어보지 못했다. ‘정신적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느 때는 형, 어느 때는 내 마음을 제일 알아주는 친구 같다고 한다. 세상 사는 방향을 알려준 ‘인간 나침반’이기도 하다. 당신, 본인이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과 인맥을 아들 뻘에게 소개시켜 주고, 나 없이도 더 친하게 지내라고 하는 것이 인간 마음상 쉽지 않은데 기꺼이 그렇게 해줬다. 한 때 정서적으로 말라가고 힘들었던 ‘이광기’라는 꽃에 매일 물 뿌려줬고, 지금도 그러는 분이다. 이름만 나와도 감동이고 눈물난다.
〈태조 왕건〉에서 이광기는 견훤의 장남, 신검 태자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아버지 견훤은 장남이 늘 못 미더웠다. 전투에 나가면 대패하고, 하는 것마다 마음이 안 들어 다음 보위 물려줄 생각은 안 하고 꾸짖기만 했다. 그래서 이광기는 극 중에서 “으이그~~~”라는 대사를 가장 많이 했고, 가슴만 쳐댔다.
촬영장 밖으로 나오면 든든한 ‘아버지가’ 있었다. 1987년 선친이 작고한 이광기에게 또 한 명의 아버지는 김종규(85)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이다. 팔순이 넘은 ‘출판계의 대부’다. 1964년 친형(김봉규)이 삼성출판사를 설립하자 부산지사장으로 일을 도왔다. 1992년에는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삼성출판사에서 펴낸 세계문학, 한국문학전집 등은 기성 세대라면 안 본 사람 없을 거다. 책으로 성공했고, 그 감사함을 독자들에게 돌려주려는 마음으로 설립한 삼성출판박물관 관장도 지냈다.
출판계의 리더로 고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부터 그와 인연이 안 닿는 문화예술인이 없다. 그 중에서도 이광기는 특별한 존재다. 김 이사장은 여전히 왕성하게 하루 스케줄 몇 개씩을 소화하는데, 이광기가 부르면, 이광기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간다.
몇 년간 갤러리 대표로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들이 조명을 받고 홀로서기 할 수 있도록 돕는 예술 셀럽, 아트 티렉터로 더 많이 활동하고 있는 이광기를 지난달 17일 만났는데, 여지없이 김 이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둘이 ‘인간탑’으로 맺어진 걸까.
● 첫 만남에 끼를 알아준 출판사 사장님
1995년. 스물 일곱의 배우 이광기는 속이 상했다. 1985년 KBS 드라마 〈해돋는 언덕〉에 아역으로 출연했지만 이후 이상하리만큼 캐스팅되지 않았다. 들어와도 주목을 끌만한 배역은 아니었다. 온전한 내 캐릭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연기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의 말로는 수만 번 고민을 했다. 10년 무명이 숙명으로 굳어지나 싶었다. 주머니는 비었고,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웠던 시절이었다.
같은 동네서 오빠, 동생으로 만난 지금의 아내를 사귀고 있을 때다. 결혼은 하고 싶은데 아내와 그 부모에게 자신있게 뭔가 내밀 처지가 아니었다. 아내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조건 좋은 남자들이 분명 있었을 테고, 이광기 본인은 평가 절하되는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하여튼, 귀여운 외모에 활발하고 훈훈한 성격으로 아내를 붙잡고 있었지만(본인 주장이다) 속으로는 불안감이 더 컸다. 아내 부모의 마음을 얻기 위해 대출을 받아 아내의 대학원 등록금까지 주기도 했다. 당시 우연히 아내의 스승 공연을 보러갔다가 김 이사장을 처음 만났다. 숙명의 시작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안에 소극장이 있거든. 그날 이애주(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 ּ 전 서울대 명예교수, 2021년 작고) 선생이 발표 공연을 했는데 나를 초청한 거야. 당시만 해도 공연하는 사람들이 돈이 어디 있겠어. 지금이야 출판사가 별 볼 일 없지만 그 때는 출판사가 후원을 많이 했거든. 소위 말해 공연 끝나고 뒷풀이 해주려고 간 거야. 공연 전에 미스 박(이광기의 아내)이 이애주 선생 제자라고 인사를 하더라고. 그 옆에 이광기가 있는 거야.”
“결혼해야 되니까 아내한테 잘 보이려고, 가방 들어주고 다닐 때였거든요. 매니저처럼. 그런데 그 때는 군대 제대하고 뭔가 내 마음대로 안 될 때였어요. 연기자로의 격동기였죠.”
김 이사장은 첫 만남 당시 밝고 예의 바르던 이광기의 첫 인상이 남달랐다고 기억한다.
“뒷풀이 하는데까지 쫓아 왔더라고. 자신의 ‘공주’를 잘 만났다는 거겠지. ‘첫 인상이 마지막 인상이다’는 말이 있는데, 이광기의 좋은 인상이 평생 갈 것 같더라고. 짧은 시간에 나한테 주는 신뢰감이 엄청 컸어. 그날 듣기로는 연기 생활이 잘 안 풀린다고 하던데, 그래도 계속 웃고 있더라고. 끼가 보였어. 여자친구 수발까지 다 들어주면서 말이지. 거기서 내 인생 마지막까지 이광기의 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
“이날 이후로 이사장님이 저를 정말 예뻐해주셨죠.”
1987년 대학 재수를 할 때 부친이 별세한 이광기에게 마음 한 구석 허전함을 채워주는 든든한 우군이 생긴 것이다.
● 내 인생 길잡이가 된 분이 또 세상 길잡이들을 연결해주다
“당시 출판사 대표라는 이사장님의 위치에서는 저의 존재감은 크지 않아 보일 수도 있죠. 제가 유명인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저의 긍정적인 에너지 하나만 보셨어요. 정말, 언제 어디서든 ‘어려운 거 있으면 얘기해라. 얘기해라’라고 해주셨어요.”
2000년 〈태조 왕건〉으로 빛을 보기 전까지, 이광기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건 세상과의 연결이다. 김 이사장이 손을 잡아 여기저기 묶어줬다.
“이사장님을 존경하는 건 정말 좋은 사람들하고 저를 잘 엮어 주세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만큼 저의 스타일과 소개해주는 분을 잘 알고 분석하고 계시다는 말이에요. 늘 이 친구하고 잘 맞을까, 저 사람하고 잘 맞을까, 그 설계를 하시더라고요. 연기자로 미래도 불투명하고 힘든 시절에 잠깐 ‘외도’를 했었어요. 매니지먼트 사업을 시작했는데, 키우려고 하는 배우가 있어서 기자를 소개받았으면 하고 이사장님께 부탁을 드렸죠. 그랬더니 아예 모 스포츠신문 대표님을 소개시켜주시는 거예요. 오라고 해서 갔더니 사장실이어서 당황했었죠(웃음). 그 때 소개를 받고 만난 기자들하고 아직도 잘 지내요.”
세상 멘토들을 많이 만났다. 김 이사장은 “이광기가 나보다 더 살 날이 많고, 개척할 것도 많으니 좋은 인연을 더 많이 만나야 한다”며 이 분야, 저 분야 귀한 인연을 만들어줬다.
‘거장’ 고 이어령 전 장관을 이광기의 멘토로 소개시켜준 것도 김 이사장이다. 이광기는 매년 1월 이 전 장관과 새해 덕담 모임을 하면서 세상 사는 지혜를 배웠다. 이 전 장관은 영면하기 전에 이광기가 작품 전시 활동과 문화 창작자들과 교류하기 위해 파주출판도시 내에 마련한 ‘스튜디오 끼(현재는 갤러리 끼)’에 기념 식수를 하고 ‘문화예술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주는 사랑받는 스튜디오 끼가 되길 희망한다’는 글을 남겨줬다.
친아들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을 줬다. 정말 감동적인 건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김 이사장의 인생 철학을 흡수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사장님을 보면 어떤 자리에서 기분 안 좋을만한 상황이라도 싫은 표정 안하고 지혜롭게 잘 넘기시더라고요. 나중에는 제가 무의식적으로 이사장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30년 동안 이어졌어요. 인생의 롤모델, 이광기라는 인간의 자양분이라 할 수 있죠.”
김 이사장 입장에서도 누구나 박수칠만한 인생 경로를 스스로 개척해온 아들같은 이광기를 자랑하고 싶었다. 이광기가 누구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했다.
“신혼 때였어요. 이사장님이 저희 집 근처 중국집 식당으로 부르시더라고요. 이사장님의 회사를 다녔던 직원이 그 식당에서 배달을 하고 있었어요. 이사장님은 그 직원분을 격려하려고 기꺼이 오신 거예요. 그리고는 저를 불러서 ‘광기, 너도 배우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열심히 살고 있잖아. 이런 얘기를 해주고 응원해줬으면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힘든 주변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치 않는 이사장님을 보고 정말 놀라고 감탄을 했죠.”
● ‘감당할 수 있는 절망’을 알다
‘몰랐다. 그렇게 내가 이사장님을 크게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2009년 11월, 이광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을 겪었다. 곱디 곱게 키운 6살 나이 큰 아들 석규를 갑작스럽게 하늘로 떠나보냈다. 신종플루에 걸렸던 석규는 마지막으로 “밖에 천둥이 쳐요”라는 말을 하고 아빠와 엄마 곁을 떠났다.
당장 나라도 아들 뒤를 따라가고 싶은, 억장이 무너지고 앞뒤 살필 경황이 없는 와중에 이광기는 가장 먼저 김 이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장인, 장모도 있고, 어머니도 있었는데도 그랬다.
“석규는 꼬마 때 우리 집에도 왔거든. 내 손녀하고 놀기도 하고. 그런데 그날 아침 7시인가 광기한테 전화가 와서 울면서 석규가 하늘로 갔다고 해. 그 전에도 광기가 장난전화도 많이 했거든. 연기자고. 진짜 장난 전화하는 줄 알았어. 펑펑 울면서‘ 갔어요. 갔어’라고 하는데, 그 소리를 듣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라고. ‘내 손자, 내 손자’ 이랬다고.”
이광기는 당시 충격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출연하던 프로그램을 자진 하차했고, 방송 활동도 중단했다. 건물 옥상에 올라가 생을 마감하려고도 했다.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러갔다가 아들 이름 ‘이석규’가 적힌 마지막 주민등록등본 서류를 15통 뭉치로 떼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주저 앉아 오열을 했다.
“정말 ‘멘붕’이었죠. 아무 것도 못했어요. 여기저기서 위로를 주시려고 불러내고도 그랬는데 그 때마다 거절을 했죠. 길거리에서 우리 아들 또래만 지나가도 눈물이 그냥 흘러내렸던 때였어요.”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괴로움에서 한동안 빠져 나오지 못했던 그는 2010년 지진이 발생한 아이티에서의 봉사를 계기로 다시 ‘이광기’로 돌아왔다.
“제가 아이티에서 만난 한 아이에게서 하늘에 가 있는 석규의 체온을 느꼈어요. 그게 선물이었죠. 저에게. ‘그래 선물을 받고 내가 치유를 하고 있으니, 그만큼 이 나라에게 선물을 주자’고 했죠.”
이광기는 아이티에 석규 보험금 전액을 긴급구호 비용으로 기부했다. 한국으로 들어와서는 아이티 돕기 자선 미술 경매를 했고, 더불어 아이티 아이들을 찍은 사진 전시 등 모금 활동을 더해 아이티에 학교 3곳을 지었다. 그러면서 작가들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본인의 세상을 새로 열었다.
“이사장님 위로를 듣고 하다보니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하늘이 나에게 견딜 수 있는 절망을 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사장님이 견딜 수 있는 절망은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 말, 위로가 너무 좋았어요. 말하자면 ‘절망은 변장된 축복’인 거죠. 더 큰 축복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 고통스러웠던 겁니다.”
생각을 바꾸고 정말 축복이 찾아왔다. 석규를 잃고 2년이 지나 새 생명이 태어났다. 석규가 다시 환생한 것처럼 아들 준서를 얻었다.
“준서 낳았다고 광기가 소식 전해줄 때, 석규가 ‘아빠 나 여기 있어’하고 나온 것 같았어. 참 대단해. 고통과 아픔을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켰잖아. 대승적 삶이고, 이것이 정말 이광기의 참다운 끼가 아닌가 싶어.”
“제가 언젠가는 하늘로 갈 때, 석규를 만나든, 아버지를 만나든, 저보다 먼저 가신 분들을 만났을 때 ‘저 열심히 살다 왔다. 손가락질 안 당하고 살다 왔습니다’고 하면 환영해주실 것 같아요. 한참 힘들었을 때 이사장님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를 확장시켜주시고, 생각의 크기를 커지게 해주신 덕입니다.”
“석규가 얼마나 위에서 감사해 하겠어. 서로 고마운 존재야. 석규는 아빠가 나로 인해 얼마 고통스러울까 걱정하고 있는데 아빠가 기가 막히게 극복을 했잖아. 더 성숙해졌잖아. 석규 입장에서는 아빠가 고맙고 ‘아빠한테 효도좀 했네’라고 생각할거야. 엄청 효자 맞아. 먼저 가서 불효자 같지만 준서를 선물했잖아.”
“맞아요. 이사장님 말씀하신 것처럼 석규가 제 눈에는 안 보이지만, 세상을 또 다르게 보게 만들어줬어요.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줬어요. 살면서 어디를 보는지 방향이 중요하다고 느껴요. 세상을 좋게 보면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하게 돼요. 이사장님이 ‘개안수술’ 시켜주신 은인입니다.”
● 광기가 광기 같은 ‘발랄 오뚝이’를 계속 찾아 냈으면
‘발랄 오뚝이’.
김 이사장이 붙여준 이광기의 별명이다. 짧은 표현 안에 이광기의 인생과 사람의 그릇을 담았다. 너무 잘 알기에 잠시 고민도 안 했다. 김 이사장은 이광기가 2021년, 석규를 보내고 12년 만에 쓰는 편지로 펴낸 책 〈내가 흘린 눈물은 꽃이 되었다〉의 서평을 썼다. 아들을 마음에 묻고 진짜 어른이 된 이광기가 대단하고 기특했다.
‘살면서 결코 겪어서는 안 될 그 큰 아픔을 숭고한 사랑과 봉사 실천으로 승화해 나아가는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광기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천연한 끼와 미소, 뜨거운 열정, 긍정의 에너지를 품은 그……’ 라고 했다.
김 이사장은 이런 이광기를 알게 돼 본인도 에너지를 받고 산다며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김 이사장은 평생 ‘시인신물념(施人愼勿念), 수시신물망(受施愼勿忘)’을 신조로 삼았다. ‘남에게 은혜를 베푼 것은 잊어버려라. 그러나 남에게 은혜를 받은 것은 잊지 말아라’는 뜻이다.
이광기에게 준 것은 기억을 안 한다. 이광기가 스스로 개척했다고 여긴다. 김 이사장은 “광기의 끼, 광기의 삶이 나에게 매일 선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며 광기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한다. 이광기를 처음부터 제대로 잘 본 것이 인생 최고로 잘 한 일 같다. 이광기가 앞으로도 더 잘 베풀고, 그 과정에서 사는 기쁨을 느꼈으면 한다.
“광기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종합 아티스트잖아요. 자신과 똑같은 ‘발랄 오뚝이’들을 잘 발굴할 겁니다.”
“이사장님하고 만나면서 문화예술계 사람들을 만나고, 전문가들을 만나고 소통하면서 시선이 달라졌죠. 시선을 선물로 주신 겁니다. 이 시선으로….”
그 시선으로 아트 작가들과 작품을 발굴하고, 대중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 시선으로 연기 분석을 더 입체적으로 해서 보는 사람들이 더 몰입하게 되는 배우가 되려고 한다.
그 시선으로 K드라마, K팝에 이어 K아트를 세계 반열에 올려놓고 싶다.
“세계가 주목할 수 있는 한국의 아트는 무엇일까 생각을 해봤어요. 오래 전부터 한중일 미술의 공통점을 찾다보니 결국 ‘먹’이더라고요. 먹과 붓으로 글씨를 쓰는데, 먹은 ‘획’으로 이어지고 글씨가 나오잖아요. 앞으로 획을 활용하면서 한국의 정서를 표현하는 작가들이 해외에서도 조명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내년에 획으로 시작하는 작가들의 전시를 하려고 계획 중이에요.”
이광기의 얘기를 듣던 김 이사장은 또 무엇을 도와줄까 고민하는 것 같다. 국내 최초로 ‘마당놀이’를 공연 장르로 대중화시킨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전 극단 미추 대표)은 김 이사장을 “타고난 봉사의 풍류객이다. 또 누굴 도와주더라도 생색 같은 건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전설과 신화를 믿지 않는 사람인데, 이어령 전 장관 추모 1주기 행사에서 ‘장관이 돌아가신 후에 전설과 신화를 믿기로 했다’는 말을 했거든. 광기야, 나는 지금까지 네가 해온 것, 현재 하는 것, 앞으로 하게 될 것, 전부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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