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하게, 중고가게 여행 [맛있는 중고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1일 11시 02분


ⓒ ODRI chatGPT
ⓒ ODRI chatGPT

‘30$, VINTAGE, PRICE NEGOTIABLE!’
나의 최애 패션아이템 점프슈트가 30달러! 게다가 ‘네고’가 ‘에이블’(깎아준다)하다니!이건 사야 해. 이것저것 골라가서 당근이랑 번개장터에 올려볼까?’

늦은 휴가를 맞아 ‘빈티지에 진심’인 미국의 몇몇 도시들을 여행하며 정말로 많은 중고가게들을 돌아다녔어요. 신기하게도 미국 빈티지샵 어딜 가든 제가 좋아하는 점프슈트가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고요. ‘제로웨이스트샵’처럼 다소 과격한(?) 환경 근본주의 가게들도 ‘신박’했어요. ‘라떼는’ 해외여행을 가면 일단 박물관급 랜드마크 명품 매장을 구경한 뒤, 교외의 아웃렛 매장으로 달려가곤 했는데요. 요즘은 ‘빈티지’, ‘중고’가게와 개성있는 ‘독립’ 상점들이 자리잡은 골목에 ‘있는’ 꿈을 꿉니다. 동네 사람처럼요. 이런 변화는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그것이 더 힙하게 느껴져서일까요, 중고거래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서일까요.

중고가게 여행의 중심은 포틀랜드였어요. 포틀랜드는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 사이, 미국의 북서부에 있는 대도시입니다. 한국에선 2011년 태어난 ‘킨포크’라는 잡지로 유명해졌죠. 이 잡지가 당시로는 혁명적인 라이프스타일 ‘천천히 살기’를 내걸었거든요. 사업은 빠른 게 중요하잖아요. 하하. 그 시절, 포틀랜드에서 마주치는 외국인은 모두 라이프와 스타일 취재 기자란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덕분에 킨포크는 곧 삶의 한 태도를 뜻하게 되었죠.

사실 포틀랜드를 설명하는 말은 많아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서점인 ‘파웰스’가 있는 곳(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보유국으로서 부러움), 처음으로 푸드트럭이 시작된 곳(진짜 ‘흑백요리사’들이 모인 곳), 인구 수 대비 가장 많은 수제 맥주와 로컬 카페가 있는 곳(물이 좋다고 해요), 아디다스와 나이키가 본사를 두고 지역민의 마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곳(플리마켓 후원사에 익숙한 로고들) 등등. 제게 묻는다면 “포틀랜드? 루이비통과 스타벅스가 세상에서 가장 겸손해 보이는 곳이야. 그래서 ‘당근 정신’이 태어났지”라고 말할 것 같아요.

‘당근 정신’, 즉 중고거래자들의 팀스피리트란? 단순히 쓰던 물건을 싸게 팔고 사는 중고매매가 아니라 지금의 중고거래 앱이 브랜딩한 아이디어들을 포틀랜드의 빈티지와 킨포크가 이미 전 세계에 알리고 시험했는데요.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관심, 윤리적 소비에 대한 각성, 건강(운동)에 대한 강박, 직장 대신 취향과 지역 공동체에 속하기 등등이 문명사회의 미래가 될 거라고 예언한 거죠. 중고거래 앱이 이런 감성을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놓았고요. 앱을 통한 미국의 중고거래 규모도 엄청나게 커지고 있거든요.

포틀랜드엔 정말 많은 빈티지 상점이 있지만 집 마당에서 직접 중고 물건을 파는 ‘야드 세일’도 자주 열립니다. 상업 우주선이 오가는 시대에 하루 종일 마당에 앉아 낡은 모자며 색 빠진 접시의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기이해 보였어요. 우리 중고거래 앱에 내놓았다가는 딱 욕먹을 물건들이었거든요. 하지만 중고는 중고인 것. ‘새상품급’ 중심의 우리 중고 시장이 유별난 것일 수도요. 고백하건대, ‘당신 근처’ 이웃과의 직거래만 가능한 중고거래 시스템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지 않으려 해요. 물건을 먼 물류 센터까지 다녀오게 하는 택배 거래도 최대한 사양하려고요. 당근 정신이란 매출을 높이는 사업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는 걸 이번 여행의 추억으로 기억하려고요. 그리하여 중고가게 여행자는 오래오래 이웃과 주고 받으며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해피엔딩.

참, 포틀랜드엔 ‘별난 상태로 놔두자(KEEP PORTLAND WEIRD)’란 표어가 여기저기 붙어있어요. 지역의 특징을 지키자는 뜻인데, 위기의 반증이겠죠. 킨포크마저 포틀랜드의 상업화에 절망해 쌀쌀한 코펜하겐으로 떠나버렸거든요. 그런데 그 킨포크가 서울의 백화점에 매장을 연 걸,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보고 말았어요. 지극히 평범한 향수 브랜드로요. 킁킁 코를 대보았지만 향은 밋밋하고, 머리는 포틀랜드와 코펜하겐과 서울을 잇는 항적도로 어질어질. 역시 지금 세계에서 가장 ‘힙’한 도시는 서울인가 봅니다.
당근,고양이,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중고#빈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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