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피범벅인 사람들이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온다. 어떤 이는 한쪽 다리가 잘렸다. 다른 이는 화상을 입어 얼굴이 녹아내렸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포탄에 맞아 실려 온 아이, 미사일을 맞아 무너진 건물에 깔려 숨을 쉬지 못하는 갓난아기….
부모들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뜬 아이를 안고 절규한다. 시체를 치우다 지친 의사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한다. “계속 찍어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이 아이의 눈과 우는 의사들을 보여주세요.”
6일 국내 개봉하는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전략적 요충지 마리우폴에서 AP통신 취재진이 20일 동안 촬영한 기록 중 뉴스에 보도되지 않은 영상까지 폭넓게 담은 작품이다.
영화는 “전쟁은 폭발이 아니라 침묵으로 시작한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카메라는 전쟁이 임박한 마리우폴 시내를 건조하게 비춘다. 외곽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한다. 한 여성은 취재진을 붙잡고 “어디로 도망가야 하냐”고 묻는다. 거칠게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 헐떡이는 취재진의 숨소리가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마리우폴은 점점 폐허로 변해간다. 거리엔 군인들이 오가고 이곳저곳에서 전투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병원엔 다치거나 죽은 아이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러시아는 민간인은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냐”고 울부짖는다. “전쟁은 엑스레이처럼 인간의 내면을 다 보여준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살기 위해 남의 가게를 턴다.
취재진은 취재 윤리를 두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전쟁 초반 사람들은 “왜 내 모습을 찍냐”, “기레기”며 취재를 거부한다. 돕지는 못할망정 카메라만 들고 다닌다며 못마땅해하는 우크라이나 군인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카메라를 반긴다. 8일째부터 봉쇄된 마리우폴에서 인터넷이 끊겨 참상을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돕는 일과 카메라로 찍는 일 중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된다”던 취재진이 끝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은 이유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폭격 장면이나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반격처럼 군사적 줄다리기는 거의 담지 않았다. 대신 폭격을 받고 울부짖고 괴로워하며 공포에 떠난 평범한 사람들을 앵글에 담으며 전쟁의 잔인함을 응시한 점이 인상적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2년이 넘어섰고, 최근 북한군까지 참전한 만큼 영화는 생각할 거리를 여럿 던진다.
취재진은 자신들을 뒤쫓는 러시아군을 피해 취재한 사진과 영상이 담긴 저장장치를 탐폰 생리대 속에 숨겨 나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취재진은 전쟁의 참상을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보도상인 퓰리처상 공공보도부문을 수상했다. 영화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상 등 전 세계 영화제에서 33개의 상을 휩쓸었다. 취재진은 아카데미 수상 소감에서 “이 트로피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거나 공격하지 않은 역사와 맞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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