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2024년)에서 주인공 히라야마는 과거 부유한 집안 출신의 사업가였던 것 같지만, 지금은 가족과도 인연을 끊고 화장실 청소를 업으로 살아간다. 시한부 암환자인 남자가 히라야마에게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며 “그림자가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라고 묻는다. 히라야마는 남자를 위로하기 위해 서로의 그림자를 겹쳐 본 뒤 그림자밟기 놀이를 한다. 이렇게 삶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버겁게 느껴질 때 떠오르는 시가 있다. 그림자마저 쉬도록 세상일을 사절한다는 사령운(謝靈運·385∼433)의 시다.
시인은 남조(南朝) 동진(東晉)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작위를 물려받아 미래가 보장된 처지였지만 권력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큰 시련을 겪었다. 이 시는 영가태수(永嘉太守)로 좌천되었다가 물러나 회계(會稽)에 숨어 살 때 지었다. 송(宋) 문제(文帝)가 세상을 등진 시인에게 친구 두 사람을 보내 설득하려 했지만, 시인은 위와 같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며 사양했다. 일찍이 장량은 공업을 이룬 뒤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로, 병만용은 많은 녹봉이 달갑지 않아 물러나 살았던 것과 달리, 자신은 본래부터 세상 모든 인연을 끊고 은거하고자 했음을 밝혔다. 동산(東山)은 시인의 선조인 사안(謝安)이 은거했던 산이기도 하다.
시에 나오는 ‘식음(息陰·그림자를 쉬게 함)’은 장자에 나오는 공자와 어부와의 대화에서 온 말이다(‘漁父’). 어부는 자신의 그림자를 싫어해 떼어놓으려 도망치다 힘이 빠져 죽는 사람을 예로 들어 세상에서 겪은 억울한 환난에 대해 고민하는 공자의 어리석음을 일깨운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림자가 사라지듯 바깥 사물에 얽매이기보다 자신의 몸을 닦고 참된 본성을 지키라는 충고다. 영화 속 두 남자는 그림자밟기 놀이로 삶의 고통과 불안을 눙치려 하고, 한시에선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말로 세상 모든 일을 내려놓겠다고 다짐했다.
산수 유람하길 좋아했던 시인의 시에는 휴식과 관련된 말이 많이 나오는데 ‘휴게’라는 시어가 이 시에서 일찌감치 쓰였다(雖非休憇地, 聊取永日閑). 현실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다면 그림자를 쉬게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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