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에 여행이라고 하면 이스탄불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도 아름답지만,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가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고대 문명의 시원을 찾아가는 여행도 색다르다. 선사시대 차탈회위크 유적지부터 히타이트(청동기), 프리기아(철기),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제국까지 그리스 로마 문명,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해가 뜨는 땅’이란 뜻의 아나톨리아반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여행을 떠났다.
●황금손 미다스왕의 도시, 고르디온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94km 떨어진 평원. 기원전 9~3세기 경 고대 프리기아 왕국의 수도였던 고르디온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봉우리가 울퉁불퉁 솟아 있다. 마치 경주 대릉원처럼 130여 개의 왕과 귀족들의 고분 유적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다.
지난해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르디온은 신화 속 이야기가 넘쳐나는 동네다. ‘황금손’과 ‘당나귀 귀’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왕이었다니! 고르디온에서 가장 큰 미다스 고분(높이 53m, 직경 300m)에 들어갈 때 무척 흥분됐다.
무덤 입구 철제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돌로 벽을 쌓은 좁고 긴 통로가 이어진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 나올 법한 긴 복도를 걸어가자 통나무를 쌓아서 만든 묘실이 나타났다. 석실 고분이 아니라 아름드리 향나무로 외벽을 쌓은 목곽분이다. 나무로 짠 널방이 무려 2700년 동안이나 썩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미다스 고분의 묘실(길이 6.2m, 폭 5.15m, 높이 3.25m)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목재 건축물이다.
기원전 740년 경에 조성된 이 무덤을 1957년 발굴했을 때 60~65세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유골의 주인공은 미다스 왕이 아니라, 아버지 고르디우스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관 옆에는 9개의 나무로 만든 테이블 위에 접시와 그릇 등이 놓여져 있었다.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서 이 곳에서 발견된 ‘미다스왕의 두개골’과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나무 테이블과 칸막이 유물을 볼 수 있었다.
미다스 고분 앞에는 고르디온 박물관이 있다. 고르디온 박물관 입구에는 말을 타고 칼을 든 알렉산더 대왕과 앞에 미로처럼 얽힌 고르디우스 매듭 그림이 붙어 있다. 알렉산더가 고르디온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333년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막힌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는 ‘발상의 전환’을 뜻하기도 한다.
신화 속 이야기인 줄 알았던 고르디우스와 미다스 왕의 전설은 1950년대 미국 펜실베니아대 발굴팀의 연구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다. 30년간 2헥타르 이상의 고르디온 성채와 무덤을 발굴하자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기원전 10~9세기에 지어진 초기 프리기아 왕국의 성채의 석조 건축물에서는 화려한 색상과 패턴화된 모자이크 벽돌로 꾸며진 바닥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벽돌 모자이크 장식이라고 한다. 이 모자이크는 고르디온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프리기아는 아나톨리아반도에서 3200년 전에 히타이트 제국이 소멸한 뒤, 기원전 12세기부터 7세기 경까지 역사의 전면에서 활약한 왕국이다. 서양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통해 소아시아(아나톨리아)에서 번영을 이끌었던 미다스를 ‘황금에 눈먼 탐욕주의자’ ‘당나귀 귀가 된 어리석은 왕’이라고 조롱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미다스는 프리기아 왕국의 황금기를 이끈 왕이었다. 서양인들은 칭기즈칸, 아틸라, 티무르와 같은 아시아의 영웅들을 문명을 파괴하는 약탈자, 도살자, 흡혈귀로 묘사했던 것과 비슷하다.
미다스 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는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폴로 신의 저주를 받아 당나귀 귀로 변한 임금의 비밀을 이발사만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어 땅을 파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땅에서 자라는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같은 전설은 신라시대 경문왕도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온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곳이 ‘갈대밭’이 아니라 ‘대나무 숲’이라는 점만 다르다. 그래서 직장내 비밀 이야기를 익명으로 외치는 커뮤니티 공간에 ‘대나무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아시아의 미다스왕과 신라시대 경문왕이 똑같은 ‘당나귀 귀’ 전설을 가진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프리기아 왕국이 이민자들이 동방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튀르키예 민족이 동방의 초원지대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방향으로 이동해왔다는 이야기는 많은데, 거꾸로 프리기아 왕국 이민자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는 역사적 교류설은 흥미롭기만 하다.
고대 프리기아 왕국에서 해방된 노예가 쓸 수 있었던 빨간색 모자는 서양문화에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올해 7월 열렸던 2024 파리올림픽의 마스코트가 바로 이 빨간색 ‘프리기아 모자’였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도 앞장선 여성(마리안느)이 이 모자를 쓰고 있다. 프리기아 모자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시민군의 상징으로 쓰였다. 프리기아 모자는 만화 스머프에서 파파 스머프가 쓰고 나오기도 한다.
●이슬람과 기독교 성지가 곳곳에
일반적으로 이슬람 사원(모스크)는 중앙에 커다란 돔이 있고, 주변에 뾰족한 첨탑이 여러개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돔 형식의 모스크는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비잔틴제국의 스타일을 받아들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지난해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12~14세기에 건축된 5개의 튀르키예 이슬람 사원의 분위기는 무척 달랐다. 앙카라, 시브리히사르, 아피온카라히사르에 있는 모스크를 방문했는데, 모두 돔이 없고 사각형 건물에 평평한 지붕을 갖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지붕을 나무 기둥으로 떠받친 목조 건물이다. 기둥은 지리산 구례 화엄사 구층암의 자연주의 모과나무 기둥처럼 울퉁불퉁한 나무결을 그대로 살렸다.
기둥 위아랫 부분에는 고대 로마시대의 신전에 쓰였던 화려한 문양의 대리석을 끼워놓기도 했다. 튀르키예 현지 관광가이드 아이발라 괵수 씨는 “섬세한 나무 조각이 잘 보존돼 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며 “튀르키예의 뿌리가 동아시아라는 걸 보여주는 모스크”이라고 말했다.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2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피온카라히사르(아피온)에는 히타이트족이 쌓은 201m 높이의 거대한 바위 성채가 도시전체를 내려다본다. 1071년 이곳에 도착한 셀주크는 화산암 꼭대기에 있는 요새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카라 히사르’(검은색 성)라고 지었다.
아피온은 강과 샘물, 온천이 유명한 도시다. 지금도 시내에는 수많은 온천이 관광객을 맞는다. 비옥하고 평활한 토지 덕분에 이곳은 각종 농업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2019년에는 ’유니스코 미식 창의도시‘로 지정됐으며, 음식축제로도 유명하다. 아피온에서 가장 유명한 작물은 바로 아편. 아피온이라는 지명도 아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모르핀 제주 등에 활용되는 양귀비(아편) 재배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아피온 시내에서 외곽으로 약 23km 정도 가면 프리기안 계곡 입구에 ‘아야지니Ayazini)’라는 동굴 마을이 나온다.
튀르키예의 유명 관광지인 카파도키아처럼 바위를 파서 주거지, 무덤, 교회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아야지니 동굴 마을의 입구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자연 암반을 파서 만든 교회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창문과 아치 출입구를 통해 빛이 쏟아져내려오는 모습은 신성한 느낌을 준다. 빛 그림자 앞에 서서 역광으로 사진을 찍으면 인생샷이 나온다.
이 곳에는 ‘인류 최초의 아파트’라고 이름붙여진 집단 거주지도 있다. 튼튼한 기반암을 깎아서 만든 동굴이 계단으로 이어져 여러층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에는 기독교 성지도 많이 남아 있다.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됐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 치하에서 기독교 문화가 꽃핀 곳도 바로 튀르키예다. 튀르키예 지역에서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해 287년까지 모두 7차례의 공의회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예수의 제자였던 바오로가 선교 여행을 떠났던 흔적도 남아 있어 성지순례를 오는 기독교인들도 많다. 사도 바오로는 세차례 선교여행을 통해 지중해 동부지역인 안티오크, 이코니온, 루스드라, 데르베, 피시디아 안티오크, 에베소,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 등에서 복음을 전했다.
튀르키예 중부의 인구 2만5000명의 소도시 얄바츠에서 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in Pisidia)가 있다. 성문 유적을 지나면 로마대로 주변에 야외극장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비잔틴 제국시절인 325년 지어져 사도 바오로에게 봉헌됐던 성 바오로 대성당 유적이 있다.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유대교 회당이 있던 바로 그 곳이다. 원형 예배당에는 돌로 만든 제대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3장에 따르면 바오로는 설교 후 이방인들에게는 환대를 받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철저히 배척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오로 일행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120km 사막길을 걸어 이코니온으로 떠났다. 바오로가 도착한 ‘이코니온’은 현재 코냐(Konya)로 불리는 도시다. 수도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250km 떨어진 코냐는 로마제국 당시 시리아에서 에페소와 로마에 이르는 대로가 지나가는 바람에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현재도 인구 140만 명으로 튀르키예에서 7번째로 큰 내륙의 중심도시다.
코냐 근교의 실레(Sille) 마을에는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던 도중 327년에 세웠다는 성당이 있다.
헬레나의 이름을 따 ‘아야 엘레니(성 헬레나)’ 성당이라고 불린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밀라노 칙령을 내리게 된 것은 어머니 헬레나의 역할이 컸다.
11세기 말 셀주크 투르크 왕조의 수도로 번성했던 코냐는 튀르키예에서 이슬람 색채가 가장 강한 도시이기도 하다. 사상가이자 시인었던 무함메드 젤랄루딘 루미(1207-1273)가 창시한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 교단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냐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루미의 무덤이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이다. 에머랄드 빛 타일로 덮인 탑이 돔 위에 우뚝솟아 있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금박으로 수를 놓은 천으로 덮인 관(棺)들이 있다.
메블라나 교단의 역대 스승들의 무덤이다. 맨 안쪽에 있는 가장 크고 중후한 관이 메블라나 루미의 관이다.
메블라나 박물관 뜰에는 흥미로운 분수가 하나 놓여 있다. 물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동안 1-2-3-2-1개의 접시에 담기면서 흐르도록 설계돼 있다. 가이드 괵수 씨는 “사람의 일생을 비유한 접시 분수”라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혼자서 태어났다가(1),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고(2), 가족을 이뤄 자식을 낳고(3), 자식이 독립하면 다시 부부끼리 살고(2), 결국에는 혼자서 죽음을 맞는다(1)는 이야기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을 만들지만, 결국엔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다.
루미는 어려운 코란 경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마(Sema)’라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신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수련 방법을 만들었다. 남자들이 하얀 옷을 펄럭이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세마’는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코냐의 IRFA(문명연구센터)에서 감상한 세마 의식은 무대 위에서 마치 하얀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대나무 피리인 네이(Ney) 반주에 맞춘 춤은 후반부로 가까워질 수록 빨라진다. 우리나라 농악도 굿거리 장단에서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점점 빨라지듯 비슷하다.
회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신과 더 가까워진다고 믿으며, 마침내 신과의 합일에 다가선다는 것. 여러개의 하얀 치마가 태양계의 행성처럼, 빙글빙글 팽이처럼 돌아가며 어지러운 원을 만들어내는데 수행자도, 보는 이도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했다.
● 인류 문명의 시원, 아나톨리아 반도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약 6000년전 경부터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이집트(나일강), 인디아(인더스강), 중국(황허) 등 4개의 거대한 강 주변 비옥한 땅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방 남부에서 약 9500년 전 신석기시대 대규모 주거지인 차탈회위크(Çatalhöyük) 유적지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2012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차탈회위크는 코냐에서 동남쪽으로 52km 떨어진 언덕 위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계획도시’다. 발굴된 18개 지층을 분석해보면 차탈회위크에서는 약 9500년전부터 천년넘는 세월 동안 최소 2000명에서 1만 명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입구에는 당시 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진흙집들을 복원해놓았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진흙집들은 집과 집 사이에 지나다닐만한 거리나 골목이 없다. 차탈회위크 주민들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사다리를 이용해, 지붕위로 나아가 옆집 지붕 위로 걸어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세로 2~4미터, 높이 3미터 가량의 집 안에 들어가보면 창고와 부엌, 거실이 있고, 정교한 벽화로 꾸며져 있다. 집마다 북쪽 벽에 뿔달린 황소의 머리를 걸고, 흙벽을 채색해 장식했다. 벽에는 별과 태양계, 사람과 여신, 사냥장면 등이 묘사돼 있다.
이 유적지에서도 농업과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상 ‘키벨레(Kibele)’가 발견됐다. 이 여신상도 앙카라의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흙으로 만든 집이라 평균 70년 정도면 수명이 다해 새로 지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벽을 허무는 대신 흙으로 공간을 메우고, 그 위에 같은 구조로 새 집을 올렸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렇게 쌓아올린 집들이 무려 18층이나 돼 높이가 지표면에서 21m나 상승했다고 한다. 주거지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시신을 집 안에 매장했던 풍습이다. 그러나 차탈회위크에서는 마을의 공동시설이나 종교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본격적인 도시라고 볼 수는 없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런데 차탈회위크에서 513km 떨어진 아나톨리아 동남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1만1500년 전 돌기둥이 100개가 넘는 대규모 종교 건축물 유적지가 발굴돼 세계 문명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학계에 더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아나톨리아반도가 인류 문명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여행지로 꼽히는 이유다.
●앙카라 가볼만한 곳=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를 튀르키예의 행정수도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고대문명이 살아 숨쉬고 있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다. 앙카라 칼레시(앙카라성) 성벽에는 로마시대 라틴어가 쓰여진 돌이 수두룩하고, 성채 위 붉게 물드는 노을에서는 청춘 남녀가 사랑을 고백한다.
하마뫼뉘 거리에선 오스만제국 스타일의 주택을 개조한 카페에서 튀르키예식 커피점을 보기도 한다. 앙카라의 현지인 맛집 울루다으(Uludag) 레스토랑에서는 ’이스켄데르 케밥‘이 시그니처 메뉴다.
‘이스켄데르(iskender)’는 알렉산더 대왕의 튀르키예식 발음. 양념한 양고기와 쇠고기를 섞어서 빙글빙글 도는 기계에서 구운 뒤 얇게 썰어내 먹는 케밥이다. 3층 창밖으로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보인다. 투명한 잔에 담긴 붉은색 홍차 안에 모스크를 담아서 사진을 찍어봤다. 튀르키예 현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앵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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