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10년간 5권의 베스트셀러…첫 로맨스 도전한 ‘스릴러 여제’ 소설가 정유정 [BreakFirst]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17일 07시 00분




소설가 정유정(58)은 자타공인 범죄스릴러의 대가입니다. 대중에게 페이지 터너(page turner·책장이 술술 넘어갈 정도로 재미있는 책)로 인정받은 악(惡)의 3부작(‘7년의 밤’ ‘28’ ‘종의 기원’) 모두 범죄스릴러 장르고요. ‘고유정 사건’을 모티브로 한 ‘완전한 행복’도 범죄스릴러죠. 적어도 이 장르만큼은 당분간 한국에서 정유정을 넘어설 작가는 없을 만큼 ‘정유정 스타일’은 곧 살벌한 스릴러로 통합니다.

그런데 그가 올해 발표한 여덟 번째 장편소설은 전작과는 사뭇 다릅니다. 신작 ‘영원한 천국’에서 처음으로 SF 로맨스에 도전한 겁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합니다.”
신작에서 정유정은 자신의 주된 장기를 잠시 내려놨습니다. 흥행이 보증된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죠.

탄탄한 팬덤을 가진 베스트셀러 작가가 ‘정유정 스타일’에 매료된 독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건, 어쩌면 신인 작가가 첫 작품을 선보이는 것 이상으로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특정 장르에 천착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맞는 방식을 찾아갈 뿐”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탄탄하게 구축해 온 익숙한 관성을 따르지 않고 낯설지만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 17년 차 소설가 정유정을 〈브렉퍼스트〉팀이 만났습니다.

※소설 ‘영원한 천국’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한국 문단에서 범죄스릴러의 대가로 불리는 소설가 정유정. 이번 신작 ‘영원한 천국’에선 등단 17년 만에 한 번도 다루지 않은 SF 로맨스 장르에 도전했다. ‘정유정 스타일’로 통하는 범죄스릴러가 아님에도 ‘영원한 천국’은 전작들에 이어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한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SF 로맨스에 도전한 스릴러 여제
“로맨스를 아주 짤막하게 한 문단으로 써본 적은 있지만 소설의 한 장을 할애해서 길게 써본 것은 처음이고 되게 힘들었어요.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웃음)”

서걱서걱 시신을 토막 내는 과정과 익사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묘사하는 일에도 좀처럼 지치는 법이 없었던(?) 정유정을 녹다운시킨 문제의 로맨스는 어떤 내용일까요.

죽음도 고통도 없는 완벽한 가상 세계 ‘롤라’와 ‘드림시어터’ 그리고 현실 세계 등 여러 차원에서 펼쳐지는 소설 ‘영원한 천국’에는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등장합니다. 경주와 지은, 그리고 해상과 제이인데요. 두 연인은 직업도 나이도 살아온 배경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했던 연인이 사망함으로써 이별과 상실을 맞는다는 것. 네 남녀의 로맨스를 ‘사랑 상실’이란 주제로 그려낸 겁니다.

“(아내 지은의 죽음은) 주인공 경주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어요. 주인공이라면 적어도 3번의 시험대에 서야 한다는 것이 평소 제 생각이거든요. 주인공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한 번의 시험으로는 부족하고요. 두 번, 세 번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시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주인공의 자격이 생긴다고 믿어요. 칼에 맞는 것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상실하는 게 더 큰 공포이자 고통이라 생각했고요.

어린 시절 정유정 작가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20대 초반 겪었던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칼 맞는 것보다 더 큰 공포이자 고통’이라는 깨달음을 줬다. 은행나무 제공
어린 시절 정유정 작가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20대 초반 겪었던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칼 맞는 것보다 더 큰 공포이자 고통’이라는 깨달음을 줬다. 은행나무 제공

칼 맞는 것보다 ‘사랑의 상실’을 더욱 가혹하다고 여긴 데에는 작가 개인의 경험이 작용했습니다. 간호사로 일했던 20대 초반, 일하던 중환자실에서 간암 투병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겁니다.

“주인공이 아내를 잃는 장면을 쓸 때 엄마 기억에 많이 울었어요. ‘엄마를 잃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 ‘그 몇 년을 어떻게 견뎠나’ 생각하며 썼어요. 어떤 상처는 일생을 걸쳐서 무슨 짓을 해도 치료가 안 돼요. 그런 상처는 그냥 상처로 남게 되죠.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고 슬퍼요. 그런데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상실의 상처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게 우리 삶이란 걸요.

소설 ‘영원한 천국’ 취재차 방문한 이집트 바하리야 사막. 그가 사막에 가기 전, 소설 속 연인 사이로 등장하는 해상과 제이는 원래 남매였다. 그런데 사막에 있는 동안 문득 해상과 제이를 연인으로 바꾸게 되었고 “작가 인생 처음으로 인물들이 알아서 가는 (이야기가 써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은행나무 제공

정유정의 전작들, 특히 범죄스릴러 소설들은 시공간의 교차나 반전 같은 입체적 구성보다 직선으로 곧게 뻗어가는 전개가 많습니다. 대신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소설 속 세계를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한 듯한 즐거움을 선사하죠.

하지만 이번 작품은 결말에 이르러 충격적인 반전이 숨어있을 뿐 아니라, SF 답게 여러 차원의 시공간이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소설의 끝에 심긴 반전까지 읽고 나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1장을 읽고 싶어지는데요. 이야기 군데군데 작가가 심어놓은 퍼즐 조각들을 한데 합쳐 다시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다시 1장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소설을 완독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계를 확장해 보고 싶었어요. 항상 우리 주변 내지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차원의 이야기를 해왔거든요. 그렇다고 다른 차원의 이야기만 하면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죠. 현실과 가상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가상 세계에 서사를 만들어 현실과 연결했어요. 그 과정에서 ‘드림시어터’(가상세계로 연결하는 시스템) 같은 장치가 불려 온 것이고요.”

“나를 쓰게 만드는 건 욕망”
‘영원한 천국’은 정유정의 욕망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2021년 발표한 ‘완전한 행복’에서 자기 행복을 위해 모든 불운의 싹을 제거하려는 나르시시스트의 파괴적 욕망을 다룬 데 이어 ‘영원한 천국’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욕망에 대한 이야기’(작가의 말)입니다.

욕망은 사회적 통념을 반영하는 단어입니다. 개인주의적 사고를 하는 서구권에서는 욕망을 개인의 자유의지 혹은 열정으로 여기고 이를 독려하는 반면, 관계주의적 사고를 하는 우리나라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타인과의 연대, 예의, 공감을 중요시하죠. 욕망을 불편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선을 느낀 그에겐 의문이 생겼습니다.

“전직이 간호사라 그런지 제 인생사가 작가가 되기엔 느닷없게 보였나 봐요. ‘당신 인생을 여기까지 끌고 온 동력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럴 때마다 제가 ‘욕망’이라고 답하거든요. 그러면 다들 놀라는 표정을 지어요. 욕망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놀랄 만한 뉘앙스를 가진 걸까. 반복해 겪다 보니 ‘욕망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졌어요.”

“네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라”는 어머니 말씀에 따라 간호대학에 진학해 간호사가 된 정유정. 20대 초반 5년간 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며 “인간은 지구상 생명체 중 하나일 뿐 특별하지 않다”는 작가로서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은행나무 제공

정유정이 17년간 8편의 장편소설을 쓰게 만든 원동력이 바로 ‘욕망’이라는 건데요. 이번 신작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야성’과 유사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망의 다른 말이죠.

“야성을 다르게 표현하면 개인의 자유의지 또는 공격성이라고 하는데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누구나 자기 삶에선 공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공격성이 사라지는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자기 삶에서의 공격성조차 나쁘게 여기거나 조롱하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공격성이 필요하다고) 환기하는 게 가치 있는 일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암 투병 10년, 5권의 베스트셀러
5권의 베스트셀러를 발표했던 10년간 그는 투병하는 암 환자였다. 짧은 커트 머리는 그가 선호하는 헤어 스타일인줄 알았지만, 실은 항암치료를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르지 못한 거였다. 동아일보DB
커트 머리는 정유정의 시그니처입니다. 신작 발표 때마다 공개석상에 등장한 그의 머리는 언제나 짧았죠. 그런데 이번엔 긴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리고 나타났습니다. 오랫동안 커트 머리를 고수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10년 전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느라 머리를 짧게 잘랐다”고요.

“(암 진단을 받고) 처음엔 화가 났어요. 왜냐하면 ‘28’ 초고를 써놓고 이제 막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할 때였거든요.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해야 했어요. 날마다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6개월 이상이더라고요.”

암 환자가 됐다 실보다 암 투병으로 집필 활동을 방해받을 것 염려됐니다. 치료받으면서 글 쓸 힘이 빠지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앞선 거죠. ‘써야 한다’는 욕망이 병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한 겁니다. 10년 동안 방사선 치료 38차례, 추적검사 20여 회, 주사 치료 2년, 약 복용 5년…. 고된 치료 과정에서도 ‘글 쓰는 일상’을 흩트리지 않는 데에 온 힘을 썼습니다.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글을 썼고 오후엔 체육관에서 ‘쇠질’을 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집필하던 소설 ‘28’ 작업 노트. 작품의 배경이 되는 ‘화양시’의 주요 도로와 철도를 비롯해 시청, 병원, 버스터미널 등이 거미줄처럼 그려져 있다. 동아일보DB
날마다 땀 흘린 탓에 방사선 치료를 위해 신체에 그려둔 표식은 매번 지워졌고요. 처음엔 걱정하던 주치의도 결국 두 손 두 발 들었습니다. “오실 때마다 그려드릴 테니 지금처럼 사는 게 환자에게는 좋겠다”면서요.

그래도 암은 죽음을 동반하는 질병인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예 없진 않았습니다.

“추적 검사를 앞두고는 불안했죠. 근데 오래가지 않았어요. 결과 듣기 직전에만 불안했어요. 검사에서 ‘괜찮다’고 하면 1년의 시간이 주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난 1년 동안 안 아플 거니까 괜찮아’ 하면서 (암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어요.”

암 투병 10년 동안 무려 5편의 장편소설을 썼습니다. 5권 모두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됐고요. 무시무시하다는 암도, 소설 쓰기를 갈망한 그의 욕망에 완패한 겁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3년 후엔 ‘무서운 언니’로 돌아온다
정유정은 독자에게 두 개의 애칭으로 불립니다. ‘무서운 언니’ ‘다정한 그녀’. 작가로서 두 개의 자아가 있다는 의미인데요. 인간의 파괴적 욕망을 다룬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이 ‘무서운 언니’가 쓴 것이라면, 성취적 욕망을 다룬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와 ‘진이, 지니’ ‘영원한 천국’은 다정한 그녀가 쓴 겁니다. 무섭고도 다정한 그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냐고요.

‘다정한 그녀’ 정유정이 쓴 ‘내 심장을 쏴라’는 2015년 영화로도 제작됐다. 정신병원에서 살다 탈출을 시도하는 두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동명 영화에서 배우 여진구(오른쪽)가 주인공 수명 역할을 맡았다. 동아일보DB

“‘내 심장을 쏴라’예요. 전 20대가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동생 두 명을 건사하기 위해 가장으로 살면서 제 인생을 살지 못했어요. 영영 탈출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살았고요. 힘들었던 청춘에 대한 은유가 ‘내 심장을 쏴라’예요. 분투하는 20대 청춘 그리고 지나간 제 청춘에게 바치는 소설입니다.

흔히들 작가의 전성기는 50, 60대라고 말합니다. 3년에 한 권씩 신작을 발표하는 그의 패턴으로 미루어봤을 때 올해 58세인 그의 차기작은 전성기의 한가운데 발표할 작품일 겁니다.

“‘영원한 천국’ 마지막 문장에 낯선 이름이 나오는데, 차기작의 주인공 이름이고요. 이번엔 ‘다정한 그녀’였으니 다음엔 ‘무서운 언니’로 돌아와 공포 스릴러 소설에 처음 도전해 보려 합니다. 앞자리가 바뀌는 만큼 40, 50대 때 썼던 소설보다는 조금 더 성숙하고 깊은 의미,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너무 감사한 일이고, 아니라면 반성하고 들어가서 더 잘하겠습니다.(꾸벅)”

정유정은 “내겐 죽기 전에 ‘궁극의 이야기’를 한 편 써야겠다는 욕망이 있다”고 했다. ‘궁극의 이야기’는 다른 말로 ‘아름답고 힘 있는 이야기’다. 그는 “무섭고 불편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한 편의 소설로서 완성도가 있다면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 완성도 안에는 문장과 문체, 묘사, 스토리, 주제가 들어갈 것이고, 글에는 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어야 한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봐도 누가 썼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이야기는 힘이 없을 수가 없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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