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잡채(雜菜)’를 잘 만들어 훗날 우의정까지 올라간 인물이 있다. 광해군 시기 문신이었던 이충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집에 땅을 파서 넓은 방을 만들고 그 안에 채소를 길러 겨울에 구하기 힘든 신선한 재료로 잡채 등 요리를 만들어 광해군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후 광해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승진을 거듭한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잡채판서’라 놀렸다고 한다.
폭군들은 모두 미식가였을까. 연산군 때 간신인 유자광은 석화(石花), 즉 굴을 연산군에게 수시로 바쳐 환심을 사고 승승장구했다. 심지어 사간원에서 “유자광이 굴과 전복을 채취해 임금에게 뇌물로 바쳤다”며 그를 탄핵하자, 연산군은 오히려 “유자광이 사사로이 내게 준 것을 탄핵했다”며 사간원의 관리들에게 장형을 때려 문책했다. 물론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 때 쓰인 실록에는 “유자광은 악행으로 얻은 전복과 굴을 진상해 임금을 호렸으니 그 죄가 크다”고 비판했다. 정권에 따라 유무죄가 달라진 진상의 속뜻은 알 수 없지만 석화, 즉 굴의 맛은 실록조차 인정한 셈.
한의학에서 굴은 몸에 좋은 귀한 약재로 인정받는다. ‘동의보감’에는 굴을 “바다에서 나는 음식 중 가장 귀하며, 안색을 좋게 만들고 피부를 곱게 한다. 해산물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언급돼 있다. 실제 자주 체하고 음식 맛을 느끼지 못하는 등 허약하고 심한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선조에게 당시(재위 7년) 이조판서였던 미암 유희춘은 그 치료제로 삶은 굴을 추천했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평생 후원자이자 한의학에도 밝았던 그는‘식료단자(食療單子)’라는 책으로 비위를 조리하는 법을 써 선조에게 바쳤는데 거기에서 굴을 추천한 것. 그는 약식동원의 원칙에 따라 선조에게 굴을 권했지만 “석화는 성질이 차갑고 미끄러워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며 과식을 경계하기도 했다.
굴은 고단백 저칼로리 식품으로 필수 아미노산 함량이 높다. 아연, 칼슘, 철분, 타우린, 인 등 무기질이 풍부해 뼈를 튼튼하게 하고 빈혈 예방에도 좋다. 특히 아연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생성 성분이라 자양강장 등 기력 회복에 크게 도움이 된다. 한의학에서는 굴을 껍질을 잘게 부숴 ‘모려분(牡蠣粉)’이라는 약재로 사용한다고 해서 ‘모려육’이라고 부르지만 승정원일기나 실록에는 ‘돌꽃’이라는 뜻의 ‘석화(石花)’라고 쓰여 있다. 갯바위에 붙어 자라는 모습이 마치 돌 위에 핀 하얀 꽃 같다는 의미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솥은 물과 불에 약해져 밑바닥이 새거나 뚫리는 일이 잦았다. 바닷물을 솥에 끓여 소금을 만드는 사람들은 솥바닥에 굴 껍질 가루(모려분)를 칠해 소금이 새지 않도록 했다. 굴의 이런 작용을 ‘수렴고삽(收斂固澁, 기혈과 진액의 과도한 배출을 막는 효능)’이라고 하는데, 한의학에선 이 때문에 모려분을 땀을 자주 흘리거나, 정액이 새거나, 소변이 줄줄 새는 증상과, 냉대하를 고치는 데 쓴다. 실제 약효도 좋다.
여기에 더해 모려분은 어지럼증과 이명의 치료에도 두드러진 약효를 보인다. 정신을 무겁게 눌러서 안정시키는 모려분의 ‘중진안신(重鎭安神)’ 작용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마음의 스트레스를 진정시키고 잠을 잘 오게 하는 것이다.
보령에 있는 대천 앞바다에는 아주 넓은 백사장이 있다. 그곳의 모래는 아주 곱고 감촉이 좋은데 대부분 굴 껍질인 모려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령에 사는 한 환자분을 상담하면서 특이한 경험담을 들었는데 “이명이 생겨 일주일에 두 번씩 대천 모래밭을 맨발로 걸었는데 어느 날 이명이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모려분의 ‘중진안신’ 효능을 생각하면 ‘영 낯선 일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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