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해체하면 노화나 늙음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신간 SF 소설집 ‘모우어’로 돌아온 천선란 인터뷰
밤이 와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6월. 소설가 천선란(31)은 캐나다 밴프의 한 호수 앞에 서 있었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쪽빛 호수와 로키산맥. 휴대폰은 먹통이 되고 세상 밖 소음과 언어가 닿지 않는 곳. 자연 앞에서 작가는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떠올렸다.
신작 소설집 ‘모우어’(문학동네)를 낸 천선란은 18일 서울 마포구 한 책방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가 얼마나 언어에 갇혀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며 “언어를 아예 해체해서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사라지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강박을 벗으면 노화나 늙음마저 사라지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천선란은 최근 가장 주목받는 젊은 SF 작가 중 한명이다. 2020년 출간한 그의 대표작 ‘천 개의 파랑’(허블)은 18만 부가 팔렸고 올 초 영국 펭귄 랜덤하우스와 억대 선인세 계약을 맺었다.
표제작 ‘모우어’는 3000년 뒤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그린다. 한때 멸종 직전까지 갔던 인류가 탐욕과 불신, 혐오는 언어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언어를 포기하도록 진화한 것. 어느 날 이 세계에 떠내려온 아이 ‘모우’가 유일하게 언어를 씀으로써 균열이 시작된다.
언어를 금지한다는 세계관은 어떻게 나왔을까. 작가는 “분명 인간도 처음에는 벌레, 곤충,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자연의 일부였을 텐데 왜 생태계로부터 떨어져 나갔을까 고민하다 보니 시작은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그 사물의 용도를 명확하게 하고 이용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나무를 장작, 관재(관을 만드는 재료), 건재(건물을 만드는 재료)라 부르는 식으로. 그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게 아닌 이상 인간은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결국 (언어를) 다시 쓰겠지만 어떻게 쓰느냐는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같은 현상도 언어를 바꾸면 느낌이 달라요. ‘지구 온난화’라는 미온적인 단어를 이제 ‘기후 위기’로 대체해서 쓰고 있는 것처럼요. 언어를 정신 차리고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언어에 ‘진심’인 것은 치매가 온 어머니를 10년간 간병하며 일상적으로 여러 차원의 언어를 구사해온 영향이 크다. “엄마와 소통할 땐 정말 간단한 수준의 언어만 사용해요. 서너 살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대화요. 글을 쓸 땐 더 높은 차원의 언어를 쓰고, 북토크 땐 좀 더 말하기 쉬운 언어를 선택하죠. 반대로 해외에 나가면 제가 영어나 독일어, 불어를 못 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나의 정체성은 다 사라져버리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0’이 돼버리는 경험을 해요. 언어가 나의 생각과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거구나 느끼는 거죠.”
그는 최근 다양한 글쓰기에 도전 중이다. ‘모우어’에 실린 단편 중 ‘서프비트’, ‘뼈의 기록’, ‘얼지 않는 호수’는 비교적 가독성 있게 썼다면 ‘모우어’, ‘쿠쉬룩’은 “확 불친절해지자”라고 마음먹고 썼다. 언어에서 뻗어 나가 도시, 가족, 사회 등 온갖 형태에도 관심이 생겼단다.
“언어라는 게 결국 생각의 집이자 형태잖아요. 지금 같은 도시 형태, 가족 형태는 왜 생겼을까, 이것을 다 해체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이어서일까. 인터뷰 중 챗GPT와 디지털교과서가 화제에 올랐을 때 그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뇌에서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다를 것 같아요. 그 아이들이 미래에 쓸 소설은 제 고정관념과 인식으로는 떠올릴 수도 없는 이미지일 거 아니에요. 그게 설레요, SF 작가로서. 또 어떤 것들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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