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라진 3000년후의 세계… 탐욕-혐오-강박도 사라졌을까요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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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모우어’ 낸 천선란 작가
“언어에 갇힌 삶 보여주고 싶어”

소설가 천선란은 소설만큼이나 과학책을 많이 읽는다. 그는 “과학이 가진 낭만을 좋아한다”며 “1970년대 발사된 보이저 1호와 아직도 교신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과학이 더 소설 같지 않냐”고 되물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밤이 와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6월. 소설가 천선란(31)은 캐나다 밴프의 한 호수 앞에 서 있었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쪽빛 호수와 로키산맥. 휴대전화는 먹통이 되고 세상 밖 소음과 언어가 닿지 않는 곳. 자연 앞에서 작가는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떠올렸다.

신작 소설집 ‘모우어’(문학동네)를 낸 천선란을 18일 서울 마포구 한 책방에서 만났다. 그는 “언어가 없으면 오늘과 내일의 경계,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강박, 노화나 늙음마저 사라지지 않을까”라며 “우리가 얼마나 언어에 갇혀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천선란은 최근 가장 주목받는 SF(공상과학) 작가 중 한 명이다. 2020년 출간한 그의 대표작 ‘천 개의 파랑’은 18만 부가 팔렸고, 올 초 영국 펭귄 랜덤하우스와 억대 선인세 계약을 맺었다.

표제작 ‘모우어’는 3000년 뒤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그린다. 한때 멸종 직전까지 갔던 인류는 탐욕과 불신, 혐오는 언어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언어를 포기하도록 진화했다. 어느 날 이 세계에 떠내려온 아이 ‘모우’가 유일하게 언어를 씀으로써 균열이 시작된다. 작가는 “인간도 처음에는 벌레, 곤충,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자연의 일부였을 텐데 왜 생태계로부터 떨어져 나갔을까 고민하다 보니 시작은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그 사물의 용도를 명확하게 하고 이용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게 아닌 이상 인간은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하지만 어떻게 쓰느냐는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같은 현상도 언어를 바꾸면 느낌이 달라요. ‘지구 온난화’라는 미온적인 단어를 이제 ‘기후 위기’로 대체해서 쓰고 있는 것처럼요. 언어를 정신 차리고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언어에 ‘진심’인 것은 치매가 온 어머니를 10년간 간병하며 일상적으로 여러 차원의 언어를 구사해온 영향이 크다. 어머니와 대화할 땐 서너 살 아이들이 쓸 것 같은 간단한 수준의 언어만 쓴다. 북토크를 할 땐 말하기 쉬운 언어를, 책을 쓸 땐 더 높은 차원의 언어를 쓴다. 그는 “해외에 나가면 외국어를 못 한다는 이유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0’이 돼버리는 경험을 한다”며 “언어가 나의 생각과 모든 것을 바꿔버리는 거구나 느끼게 된다”고 했다.

그는 최근 다양한 글쓰기에 도전 중이다. 소설집 수록 작품도 소재와 결이 다양하다. 초능력을 가진 10대 청소년들을 다룬 ‘서프비트’, 장의사 안드로이드를 소재로 한 ‘뼈의 기록’ 등은 가독성 있게, 반면 마인드 업로딩을 소재로 한 ‘쿠쉬룩’ 등은 “확 불친절해지자”라고 마음먹고 썼다. 언어에서 뻗어 나가 도시, 가족, 사회 등 온갖 형태의 구조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그는 “언어라는 게 결국 생각의 집이자 형태다”라며 “지금 같은 도시 형태, 가족 형태는 왜 생겼을까, 이것을 다 해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특히 고정관념의 해체는 그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다. 인터뷰 중 챗GPT나 디지털교과서가 화제에 올랐을 때 그는 상기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즘 아이들은 뇌에서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다를 것 같아요. 그 아이들이 미래에 쓸 소설은 제 고정관념과 인식으로는 떠올릴 수도 없는 이미지일 거 아니에요. 그게 설레요. SF 작가로서. 또 어떤 것들이 나올까.”

#소설집#모우어#천선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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