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영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서는 스타 셰프들이 한국의 전통장(고추장, 된장, 간장)을 주제로 기발한 음식을 선보였다. 우리나라 음식 맛의 정수인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가 예고되고 있다. 최종 등재는 12월 2∼7일 파라과이에서 열리는 제1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된다. 담양과 순창의 장 담그기 명인들을 찾아 ‘K미식 장벨트 기차여행’을 떠났다.
● 담양 죽염으로 담그는 전통장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대숲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1200여 개의 항아리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대한민국식품명인 제35호(진장) 기순도 할머니의 보물단지들이다. 기 명인이 항아리 뚜껑을 열고 표주박으로 간장을 퍼올리자 먹물처럼 새까만 간장 위로 푸른 하늘이 반짝였다.
“집안에서 10대째 종부들이 지켜온 간장입니다. 370년이 넘은 씨간장이에요.”
기 명인은 스물네 살 때 담양 장흥 고씨 양진재 종가의 종부로 시집온 후 50년이 넘도록 장을 담가 왔다. 제사나 명절 등 특별한 날에만 조금씩 꺼내 쓰는 씨간장은 2∼3년에 한 번씩 ‘진장(5년 넘게 숙성한 간장)’을 부어 양을 유지한다. 기 명인이 따라준 씨간장을 혀끝으로 살짝 맛보았더니 온몸의 미각세포를 일깨운다. 그는 “씨간장은 약입니다. 오늘 저녁에 속이 좀 편안하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시 국빈 만찬에서 ‘독도새우’와 함께 기 명인의 370년 된 씨간장으로 구운 ‘한우갈비구이’가 화제를 모았다. AFP통신, 데일리메일 등은 “미국보다 더 오래된 간장이 메뉴로 제공됐다”고 소개했다. 기 명인은 2021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초청됐을 때도 작은 항아리에 씨간장을 담아 갔다. 유네스코 측은 이 씨간장을 금고에 보관할 정도로 예우했다.
기 명인으로부터 장 담그기를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메주에 ‘죽염수’를 붓고 대나무를 태워 만든 숯과 고추, 대추를 넣어서 담그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이 집의 장맛의 토대는 바로 ‘죽염(竹鹽)’으로, 담양의 3년 이상 자란 왕대를 잘라 천일염을 넣고 소나무 장작불에서 구워내 만든다. 죽염에 지하 150m 암반수를 섞은 죽염수로 담근 간장과 된장은 짜지 않고 감칠맛이 난다.
“메주는 콩을 동짓달에 끓여서, 섣달에 발효를 시킵니다. 정월엔 장을 담그지요. 좋은 날을 받아서 장을 담글 때는 항상 목욕재계하고, 기도하고 시작합니다.”
상온에서 2∼3개월 숙성한 뒤에는 ‘장 가르기’를 할 때가 온다. 병 속에서 잘 발효돼 짙은 색으로 변한 죽염수를 따라 내는 것이다.
“왜 장 가르기를 하는 거죠?” “장을 갈라서 담아줘야 메주는 된장이 되고, 액체는 간장이 되지요.”
아, 그렇구나! 메주로 된장을 만드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의 메주에서 동시에 간장도 나오고 된장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간장과 된장이 함께 나오는 건 우리 문화의 특징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된장은 된장대로, 간장은 간장대로 따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메주가 없이 콩으로 발효를 시키기 때문에 한 가지밖에 만들 수가 없지요.”(기순도 명인)
간장을 따라 낸 후에는 병 속에 남은 메주를 긁어내 잘게 부수면 된장이 된다. 된장을 담은 병(450g)과 간장을 담은 병(300mlL에 이름과 날짜를 써서 라벨을 붙인다. 체험 참가자들은 이 병을 집으로 가져가 숙성 후 먹을 수 있다.
담양의 명품은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 사이로 청량한 바람이 스치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다. 담양 삼다리 대나무 숲 속에는 가을인데 하얀색 꽃이 피어 있다. 귀하디 귀한 이 꽃은 바로 ‘차 꽃’이다. 차나무는 봄에 새순을 따서 차를 만드는데, 꽃은 가을에서 초겨울인 10∼11월에 꽃을 피운다.
삼다리 내다마을에 있는 찻집 명가혜에서 차 꽃을 띄운 차를 만났다. 매화꽃이나 국화꽃, 연꽃을 띄운 차는 마셔봤지만, 차꽃을 띄워서 마시는 차는 처음이다. 담양에서는 대나무 숲속에서 차나무가 자생한다. 댓잎 이슬을 먹고 자란다고 해서 ‘죽로차(竹露茶)’다. 명가혜에서는 죽순 껍데기를 덖고 비벼서 만든 ‘죽신 황금차’도 맛볼 수 있다.
담양 삼다리 죽세공품 판매점 ‘담다’ 2층에서는 버선금줄 만들기 체험도 한다. 기순도 명인의 항아리에도 흰색 버선 모양의 종이가 거꾸로 붙어 있었다. 버선을 거꾸로 붙이는 이유는 나쁜 병균들이 버선을 타고 올라가다가 버선코의 끝부분에서 더는 올라가지 못하고 소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 순창 고추장 민속마을
전북 순창의 강천산(剛泉山) 계곡은 기암괴석과 병풍폭포, 용소 등 크고 작은 폭포가 즐비해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곳. 진한 붉은색 단풍 빛이 가장 오래간다는 ‘애기단풍’이 한창이었다. 계곡에 놓여 있는 ‘송음교(松蔭橋)’의 기둥과 난간은 메주를 새끼줄로 엮은 모양이라 이곳이 ‘순창 고추장’의 본향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아미산 자락에 있는 순창고추장민속마을은 군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추장 제조 장인을 모아 1994∼1997년 계획적으로 조성한 마을이다. 이곳의 ‘순창장본가’에서 강순옥 식품명인(64호·순창고추장)과 함께 고추장 담그기에 도전했다.
강 명인은 “순창에서는 고추장을 담글 때 네모난 메주가 아니라 도넛처럼 가운데가 뻥 뚫린 동그란 모양의 ‘떡메주’(고추장 전용 메주)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고추장 만들기뿐 아니라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에 소개된 ‘고추장 버터’ 만들기 체험도 있어 외국인들에게도 인기다. 버터 30g에 고추장과 꿀, 쪽파, 말린 마늘 조각 등을 취향에 맞게 넣어서 ‘나만의 이색 버터’를 만드는 것. 바게트 빵에 고추장 버터를 발라서 먹으니 동서양이 섞인 오묘한 맛이 난다. 외국인은 버터 맛을 좋아할 것이고, 한국인은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꿀맛에 반해버리는 특제 소스다.
이렇게 장을 담근 후 최종 완성까지는 발효와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통장은 대표적인 ‘슬로 푸드(Slow Food)’다. 이 ‘시간’을 책임지는 도구가 바로 옹기다.
순창옹기체험관을 찾아 대한민국 향토명품 장인 권운주 도예가로부터 옹기 만드는 법을 배웠다. 물레 위에 흙을 올려놓고 그릇을 빚어 보는 시간이다. 체험을 마친 뒤 결과물인 그릇을 구운 후 택배로 집으로 보내준다.
섭씨 1200도의 고열의 불에 한 번 구워내는 옹기 항아리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통기성(通氣性)이다. 옹기는 물은 통과하지 못하지만, 공기는 통과시키는 그릇이다. 그래서 옹기 항아리는 ‘숨을 쉰다’고 말한다. 도자기는 순도 높은 흙으로 빚어 고온의 가마에서 두 번 굽기 때문에 빈틈이 거의 없다. 반면 옹기는 잡티가 많이 포함돼 있는 질흙으로 만든다. 그래서 굽는 과정에서 유기물질로 인해 미세한 기공이 생긴다. 이 미세한 기공 덕분에 항아리는 숨을 쉬고, 옹기 덕분에 우리나라는 발효 음식이 발달할 수 있었다.
담양의 기순도 명인과 순창의 강순옥 명인도 다음 달 2일 파라과이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해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 코레일관광개발은 함께 담양과 순창의 명인들로부터 장 담그기를 배우고 음식을 맛보는 ‘K-미식 장 벨트 기차여행’ 코스를 만들었다.
● 맛집=순창에서는 미슐랭 스타 유현수 셰프가 고추장, 간장, 된장 3가지 소스를 이용해 개발한 ‘순창 삼합’이 화제다. 삼합이란 원래 삼겹살 수육과 홍어를 묵은김치에 싸먹는 음식. 순창삼합은 고추장 양념을 한 ‘섬진강 고추장 장어튀김’, 숙성된 간장으로 절인 ‘순창 씨간장김치’, 구수한 청국장 소스를 얹은 ‘순창 청국장 수육’으로 구성됐다. 내륙 지방이라 홍어 대신 섬진강 장어를 내세운 게 흥미롭다. 그런데 오히려 주인공은 재료 위에 듬뿍 발라져 있는 전통소스 3총사다. 느끼한 장어 튀김을 순창고추장이 매콤달콤하게 잡아주고, 수십 년 묵은 명가의 씨간장으로 담은 김치로 싸먹으면 모든 음식이 마침내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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