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4개 팀 감독(OB, LG, 한화, 히어로즈)을 지낸 이광환 전 감독(76)은 2020년 건강 검진에서 폐가 굳어지는 증세, 일명 폐섬유화가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60년 가까이 피워 온 담배를 끊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여자 야구, 리틀 야구 관련 일을 모두 내려놓고 공기 좋은 제주로 향했다. 폐섬유화에 좋지 않은 매연과 미세먼지를 피해 제주행을 택한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제주살이는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대구 출신인 그에게 제주는 오래전부터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부터 제주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1970년대 중반 친구와 함께 제주로 무전여행을 온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동해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주에 와 한라산을 올랐다.
프로야구 원년이던 1982년 그는 OB 베어스의 우승 코치였다. 이번엔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왔다. 당시만 해도 택시를 빌려 제주를 관광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은퇴하면 제주에 와서 낚시나 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택시 기사가 그를 정말 바닷가 낚시터 앞 비어있는 집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덜컥 그 집을 사면서 제주와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돼 버렸다.
1990년대 말 그는 제주 서귀포시에 ‘야구인의 마을’을 조성했다. 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다양한 야구 관련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야구박물관인 ‘한국야구명예전당’도 만들었다. 서귀포시는 2005년 강창학체육공원 부지 내에 야구장을 조성했는데 그때 자문을 맡아 산파 노릇을 한 것도 이 감독이었다. 강창학야구장은 2008년 그가 초대 사령탑으로 부임한 우리 히어로즈의 창단 첫 전지훈련지이기도 했다.
제주는 70대의 나이에 다시 찾은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제주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1년에 한 번 서울로 올라와 검사를 받는데 폐섬유화가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결과를 받았다.
서귀포에 위치한 치유의 숲이 그의 ‘병원’ 역할을 했다. 주말이면 편백나무가 심어진 그곳을 2시간가량 올랐다. 편백나무로 만든 평상에 한참 누워있다가 내려오곤 했다.
올여름부터는 중문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맨발걷기를 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시간 가량 바닷가를 걷는다. 그는 “맨발로 촉촉한 모래사장을 걷다 보면 심신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며 “바닷가의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는 어싱(Earthing·땅과의 접촉)이 요즘 내 건강비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 LG 감독을 할 때도 자연과 교감하며 승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곤 했다. 그는 “경기가 없는 월요일만 되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계곡을 찾았다. 네 발로 계곡을 오르내리곤 했는데 단 하루의 어싱으로 일주일을 버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제주로부터 받기만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제주에 내려온 해부터 올해까지 5년째 한 초등학교의 스쿨존 교통안전 지킴이 봉사를 하고 있다. 오전 7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초등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돕는다. 그는 “처음 왔을 때 콧물 질질 흘리던 1, 2학년 아이들이 이제는 어엿한 고학년이 돼 있다”며 “아이들 커 가는 걸 보는 게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정말 이뻐 죽겠다”며 웃었다.
KBO 육성위원장 시절 티볼 보급에 앞장섰던 그는 지금도 제주 지역에서 실시되는 티볼 강습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찾아가는 티볼교실’의 강사로 나이를 잊은 채 손자뻘 아이들과 구슬땀을 흘린다.
한일은행에서 야구를 했던 그는 1977년 중앙고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OB 코치를 거쳐 OB 감독이 됐고, 이후 LG, 한화, 우리 히어로즈 등 4개 팀의 감독직을 수행했다. KBO 육성위원장을 맡았고, 2010년부터 10년간은 무보수로 서울대 야구부 감독으로 일했다. 여자야구연맹 고문이자 여자 야구 대표팀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1994년 LG의 신바람 야구는 그의 야구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일본과 미국 연수를 통해 배운 투수 분업화를 한국 야구에 접목시키면서 한국 야구 수준을 한층 높였다. 그해 신인 3인방 류지현-김재현-서용빈의 활약 속에 LG가 한국시리즈 정상에 서며 LG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이후 LG가 다시 한국시리즈 정상에 서기까지는 29년이 걸렸다.
그가 감독을 하면서 키운 많은 이들이 지금은 한국 프로야구의 기둥으로 활약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지난달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이범호 KIA 감독을 들 수 있다.
이 전 감독이 2001년 한화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이범호 감독은 2년차 내야수였다. 재능은 좋았지만 수비가 거칠던 시절이었다. 이 전 감독은 이범호를 주전 3루수로 밀었다. 하지만 구단 수뇌부의 생각은 달랐다. 이 전 감독과 구단 수뇌부는 이범호의 3루수 기용 여부를 두고 멱살잡이까지 했다. 그렇게 키워낸 이범호는 프로 3년 차부터 두 자릿수 홈런을 치는 거포 내야수로 성장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삼성의 이종열 단장 역시 그의 LG 시절 애제자다. 그는 “한국시리즈를 보면서 우산장수와 나막신장수를 둔 엄마 같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이 밖에 그의 지도하에 성장한 박종훈(KBO경기운영위원), 류지현 전 LG 감독, 강정호(전 피츠버그) 등이 꾸준히 그에게 안부 인사를 전한다.
여자 야구 선수들이나 서울대 야구부 출신들도 돌아가면서 제주를 찾아 그에게 인사를 한다. 안부 전화를 하거나 작은 선물을 보내는 선수들도 많다. 이 전 감독은 “나와 함께 야구를 했던 제자들중에 잘 된 사람들이 많다. 서울대 야구부 여자 매니저 중에는 검사가 된 아이도 세 명이나 된다”며 “애들이 올 때마다 아들, 딸이 오는 것처럼 반갑다. 꼬박꼬박 인사도 오고, 봉투를 만들어 오기도 한다”며 웃었다.
그가 가장 오래 감독직을 맡았던 건 서울대 야구부다. 2010년부터 무려 10년간 서울대 야구부를 지도했다. 당시 코치 교육을 위한 베이스볼 아카데미가 서울대에 설립됐는데 학교를 찾았다가 서울대 야구부원들이 부족한 실력에도 열정적으로 야구하는 모습을 보고 “도움을 줘야겠다” 생각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삽질‘이었다. 당시 서울대 야구부원들은 돌밭이나 다름없는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다. 야구 실력도 모자라니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는 삽을 들고 돌멩이를 골라냈다. 감독이 삽을 들자 선수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돌을 줍고 운동장을 고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 전 감독은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야구를 통해 예의와 정신을 가르치려 했다. 야구에는 협동심, 인내심 희생정신이 모두 필요하다. 장차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서울대생들에게 더욱 필요한 덕목이었다”며 “야구를 못한다고 팀에서 내보낸 적은 없다. 하지만 팀플레이를 하지 않고, 협동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애들은 모두 다 내보냈다”고 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서울대 감독 퇴임식을 갖기 전 그는 서울대가 주는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이 상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해 헌신적인 사회봉사 활동으로 국민과 사회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학내 구성원들의 귀감이 되는 서울대 학내구성원, 동문에게 주는 상이다. 서울대 감독 10년 만에 받은 뜻깊은 상이었다. 이 전 감독은 “서울대 아이들에게 야구 기술은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약속을 잘 지키고, 쓰레기를 솔선수범해서 치우기 등 인성을 중심으로 가르쳤다”고 했다.
50여년의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여러 차례의 감독 계약으로 받은 돈 대부분은 야구박물관 건립 등을 위해 썼다. KBO 육성위원장 등을 맡았을 때도 판공비의 거의 전부를 학생들 식사비용으로 썼다.
그래도 그에게는 서귀포야구장에 그만을 위한 나무가 하나 있다. 야구장 건립 당시 물심양면으로 애쓴 그를 위해 서귀포시에서 심은 은행나무다. 야구장 주변은 야자수가 대부분인데 유일하게 은행나무 한 그루가 야구장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심겨 있다. 이 전 감독은 “사는 데까지 건강하게 사는 게 이제 남은 꿈”이라며 “묘도 필요 없다. 그 은행나무에서 수목장을 치를 것이다. 은행나무가 되어 언제까지나 좋아했던 야구를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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