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2일. 임요환과 홍진호가 에버 2004 온게임넷 스타리그 4강전에서 맞붙었다. 올해 이달로 딱 20년이 됐다.
임요환은 일꾼을 동원해 상대 앞마당에 벙커를 짓고 초반에 압박하는 전술, 벙커링을 통해 5판 3선승제 승부에서 필요한 승수를 내리 따내면서 결승에 오른다. 홍진호는 승부추가 기울어진 가운데서도 첫 경기 14분을 버티면서 분투하지만, 이후 2·3경기는 4분여 만에 내리 내준다. 3회 연속 벙커링, 흔히 ‘삼연벙’으로 오늘날 회자된다.
● 삼연벙이 던진 질문
2001 코카콜라배부터 쌓아온 두 선수의 라이벌 서사가 허망했다. 당시 논란도 컸다. 둘의 합(合)을 보고 싶어 했던 당시 팬들은 상대를 빠르게 봉쇄하는 임요환의 최적화 전략이 지나치게 승패에만 연연했다며 비판했다. 반면 프로의 세계에서 승부에 집착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는 반박도 비등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저그로선 최적화 수준이 높은 테란의 전략을 막기 어려웠다는 점(초반 일꾼 동원 벙커링을 극복한 것은 저그도 최적화 수준이 높아진 다음)이다.
그날 게임은 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게임이란 무엇인가? 스타크래프트란 결국 가장 빠른 시간대에 상대를 초살하는 최적화로 수렴되는 것인가? 그동안 양자가 경합하는 가운데서 발생하는 창의적 해법과, 이로 인해 생기는 미학(독창적이던 박용욱과 강민, 홍진호의 경기에서 우린 이런 인상을 받았다)이란 무엇이었나? 분투에서 느껴지는 비감, 양자의 합에서 드러나는 예술성은 무엇이었나? 모두 착시였나?
삼연벙 이후로도 게임은 진화를 거듭한다. 저그가 최적화를 하는 과정에서 테란은 벙커링이라는 답지 대신 ‘원배럭 더블’ 전략의 효율성을 다듬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게임은 궁극의 최적화를 향해갔다. 이를테면 저그는 저그대로 빠른 뮤탈리스크 전략으로 최적화한다. 진화라는 점에서 프로토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결국 3종족 모두 패러다임이 고정된다.
벙커링 이후 20년이 흘렀다. 이제 게임은 정해진 길, 공식에 철저하다. 현 스타크래프트 최강자로 최근 개인 리그를 3연패 한 ‘철벽’ 저그 김민철의 경우 이와 같은 최적화에 관한 한 빈틈이 없다. 그것이 이 시대의 미학이다.
악랄했던 박용욱의 프로브와 홍진호식 폭풍 저그, 조정현식 대나무 테란의 독창성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이제 게임을 보는 이들은 승리 공식에서 한치의 벗어나지 않는 철저함에서 미감을 느낀다. 이전과는 달라진 감상법이다.
기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분기점은 그날의 벙커링이었다. 벙커링이 아니었더라도 최적화의 시대가 도래했을 것이다. 다만 그날의 벙커링은 일꾼 정찰 시점과 병력 동원 시점을 초 같이 계산해서 진출하는 최적화의 절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았다. 그것이 삼연벙이다.
● 그러나 다시, 삼연벙이란 무엇인가
스타크래프트를 보는 이들이 20년 전 느낀 감정을 이제 온 세상이 느낀다. AI 때문이다.
바둑기사 이세돌은 이달 1일 서울대에서 열린 특별 강연에서 “예술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일컬어 바둑을 예술이라고 배운 마지막 세대라고 하면서다. 한없이 승률이 높은 수만을 찾고, 이를 의심하지 않는 AI 바둑은 예술이 아니라는 것.
그는 승패가 바둑의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말했다. “승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그 순간 끝난 게 아니다.”
그러나 삼연벙 이래 스타크래프트에선, 게임을 예술로 보는 시각을 ‘아마추어리즘’으로 분류한다. 만약 한판의 게임이(혹은 대국이) 예술이라고 하더라도, 승패를 떠나서 어떤 가치를 지닌단 말인가. 삼연벙 이후 그 질문은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 오랫동안 그 답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이세돌은 되풀이한다. 예술엔 정답이 없다고. 그렇다면 나에게 스스로 다시 묻는다. 삶이란 예술인가, 게임인가.
최적화를 향한 진화, 공식 정립으로 나아갈 게임의 운명을 예감하면서, 나는 2004년 11월 12일 방송이 끝난 뒤에도 그 채널을 한참 더 봤다. 아버지가 “게임 좀 그만 보고, 잠이나 자라”고 할 때도 나는 오랫동안 영상을 찾아보면서, 게임을 돌이키고 또 돌이켰다. 제발 좀 자라. 아버지가 내 등을 때리면서 하소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 의미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확정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속에 대고 묻는다. 삼연벙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던지는 동안 지금도 불필요한 것을 곱씹고 매달린다. 결함을 안은 인간으로서, 불가피하다. 그렇게 존재한다. 벌써 20년이 지났던가.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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