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탁본 명장 흥선 스님
“먹부터 바르다 스며들면 안 지워져… 전국 8000점 중 800점밖에 못 마쳐”
정림사지 석탑-충주 고구려비 등… 10여 년간 금석문 탁본 조사 이끌어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과 국가유산청이 지난해 10여 년간의 1차 ‘금석문 탁본(拓本) 조사 사업(2013∼2023)’을 마치고 올해 2차 사업(2024∼2028)에 들어갔다. 총괄 책임연구원으로 이 사업을 이끄는 이가 최근 조계종 탁본 명장으로 지정된 흥선 스님(사진)이다.
21일 서울 종로구 템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에서 만난 흥선 스님은 “탁본은 먹과 빛, 바람 등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하는 섬세한 작업인데 과거에 아무렇게나 하다 보니 훼손된 국보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40년 넘게 탁본에 천착해 온 그는 불교중앙박물관장, 문화유산 위원 등을 역임하며 국보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충주 고구려비 등 전국의 주요 금석문 수천 점을 채탁(採拓)한 전문가다.
―최근 강의에서 “먹칠로 훼손되는 국보가 더는 없어야 한다”고 하셨더군요.
“탁본은 종이를 비석에 먼저 올리고 그 위를 먹 방망이로 두드려 떠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전문가도 없고 또 아무나 하다 보니 거꾸로 먹을 먼저 바르고 그 위에 종이를 대서 떠냈어요. 문화재에 먹칠을 한 거죠. 먹은 한번 스며들면 거의 안 지워집니다. 국가유산인 경기 여주 고달사지 승탑, 경북 포항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 등 잘못된 탁본으로 훼손된 문화유산이 많지요.”
―빛과 바람까지 고려해야 한다고요.
“바람이 세게 불면 종이를 붙일 수가 없으니까요. 금석문은 거의 모두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은 것이라 글자나 그림이 아주 희미한 게 많습니다. 햇빛이 어디서 어떻게 비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르지요. 먹의 농도가 잘 배었는지도 다르게 보이고요. 추우면 돌이 얼고, 비가 와도 할 수 없습니다. 습도도 영향을 미치지요. 그래서 1년에 작업을 할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금석문 탁본 조사 사업이 이뤄진 것은 세종대왕 이후 사실상 처음이라고요.
“관심 있는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한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국가 차원에서 한 것은 세종대왕 이후 처음이지요. 금석문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문화유산, 예술품일 뿐만 아니라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더욱이 당대의 명필, 명문장가가 쓰거나 지은 글을 새긴 경우가 많아 서예사적으로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관심 부족으로 제대로 조사, 연구된 것이 많지 않아요. 현재 파악된 금석문이 전국에 1만2000점 정도인데, 이 중 꼭 탁본해야 할 것은 8000점 정도입니다. 하지만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800여 점만 마친 상태지요.”
―전부 조사하려면 100년도 넘게 걸릴 것 같습니다만….
“처음에는 충분한 예산과 인력이 뒷받침되면 한 15∼20년 정도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예산이 자꾸 깎여서 인건비도 제대로 안 되다 보니….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부심이 아니라 되레 자괴감을 느끼니 안타깝지요.”
―나랏일에 개인적으로 비용을 모아 충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꼭 필요한 일이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하니까요. 지난해 경기 양평에서 이행원이란 사람의 신도비를 탁본 조사했더니 신필(神筆)이라 불렸던 신라의 김생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학계에 보고도 되지 않았던 것이죠. 김생의 글씨는 책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고 오직 비석으로만 확인되고 있어요. 이렇게 중요한 문화유산이 계속 나오는데 어렵다고 멈출 수는 없지요. 탁본 작업과 함께 금석문 전반에 대한 인문학적 교육, 올바른 탁본 방법 등에 대한 교육도 국가 차원에서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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