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고스트라이터로 생계를 유지하는 화자 ‘윤지’는 이모 ‘선임’으로부터 자서전 작업을 의뢰받는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됐지만 가부장적인 외가 식구와 아들로부터 끊임없이 성적 정체성을 부정당한 ‘선임’은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기억하고자 자서전 발간을 결심한다. 이를 기록하는 ‘윤지’ 역시 30여 년 전 죽은 고등학교 동창에 관해 조각난 기억을 고통스레 이어 맞추게 된다.
‘윤지’의 명멸하는 기억을 직조하듯 엮어내면서 소설은 깊이감과 흥미진진함을 더한다. ‘윤지’가 10대에 겪은 감정의 밑바닥에 대한 회고는 같은 시절을 경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고개를 주억일 법하다. 꼭 맞아떨어지는 참신한 비유가 곳곳에 들어찬 덕분이다. 짝사랑에 낙오된 마음을 가무리는 자세는 “‘신포도설’의 여우로 남아 두 사람이 풍기는 상큼하고 달착지근한 향내를 맛이 시어 따 먹지 않는 포도라는 듯 시큰둥한 척했다”고 묘사한다.
꿈틀대는 감정을 눈에 보일 듯 섬세하게 표현한 문장들은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외사랑으로 인해 들끓고 시리는 마음은 “낱장으로 떨어진 장미 꽃잎이 검붉어서 왈칵 토해진 핏덩이처럼 보였다. 자전거를 바라보는 눈이 시근거렸다”고 전한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소설의 백미는 시간 저편으로 침잠한 기억을 직관적으로 심상화한 대목들이다. “내 입맛대로 과거를 저장하는 건 나만의 회상법일지도 모른다. (중략) 이후에 전개된 일들은 미세한 입자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졌다.”
소설 속 표현처럼, 기억은 “한여름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에 시야가 하얗게 바래듯” 휘발되곤 한다. 뼈아픈 기억일수록 “망각의 늪에 빠진 묵직한 돌덩어리”처럼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고통스럽게 길어 올리는 소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날카로운 편린을 모아 과오를 마주해 볼 용기를 얻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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