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작가 아멜리 노통브 신작… 아버지가 직접 겪은 사건서 영감
인질 협상 중 총구 앞에 선 남자… 불현듯 선명해지는 생의 감각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는 삶… 프랑스 ‘르노도 문학상’ 수상
◇첫 번째 피/아멜리 노통브 지음·이상해 옮김/208쪽·1만3800원·열린책들
4개월째 이어진 인질 협상이 파국으로 치닫는 듯하다. 콩고 스탠리빌을 점령한 반군 무리는 결국 인질 중 한 명인 주인공을 트럭에 강제로 태운다. 목적지는 사형장. 트럭이 멈추자 12의 집행인이 사형대 앞 흙바닥에 그를 내동댕이친다. 이윽고 이들은 총으로 일제히 그를 조준한다. 그는 “눈앞에 지난 삶의 각 순간이 줄지어 지나가는 게 보이느냐고? 내가 느끼는 유일한 것은 하나의 놀라운 혁명,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다”라고 속으로 되뇐다. 그의 생에 대한 열망은 계속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사형장의 한 장면에서 시작해 ‘살아있음’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아멜리 노통브의 신작이 번역 출간됐다. 벨기에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그는 이 작품으로 프랑스 4대 문학상인 ‘르노도(Renaudot)’상을 거머쥐었다. 그가 스물다섯 살인 1992년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은 단번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2015년엔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벨기에 왕실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데뷔 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의 매년 작품을 낼 만큼 다작을 했는데, 신간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외교관이던 아버지가 실제 콩고에 파견돼 외교부 영사로 일할 당시 겪은 ‘1964년 콩고 반군 인질극’을 모티브로 삼아서다. 소설 도입부의 사형대에 선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 파트릭 노통브를 모델로 했다. 작가 스스로 아버지의 삶에 ‘빙의해’ 1인칭 시점으로 일대기를 써 내려간다.
노통브의 아버지는 벨기에 인질들의 대표이자 정부 대표 자격으로 수개월 동안 반군과 협상한다. 이때 목숨을 겨우 부지한 그는 3년 뒤 작가를 낳는다. 노통브는 2020년 팬데믹으로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그를 그리워하며 ‘아버지 영전에 바치는 추도사’로 신간을 펴냈다.
200쪽 내외로 길지 않은 신간은 담담한 문체로 후반부까지 속도감 있게 흘러간다. 한 사람의 일대기나 회고록을 빠르게 훑는 느낌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던 주인공 파트릭. 아버지 부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강해지려고 노력한 유년기부터 첫 연애를 시작한 학창 시절, 결혼, 외교관 입문 등의 이야기가 유쾌하게 펼쳐진다. 인질극 외에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작은 에피소드들이 촘촘히 모여 작가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이 완성된다.
다만, 실제 사건이던 인질극 외에 소설 속 어느 대목이 노통브 아버지의 실제 모습이고, 어느 부분이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과 허구를 가로지르는 문장들 속에서 독자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생에 대한 집착’을 되새기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선 처음의 사형장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 그를 향해 총탄이 발사되려던 순간, 그와 협상하며 많은 대화를 주고받은 반군 지도자가 나타나 “집행 중단”을 외친다. 파트릭은 “나는 살아있고,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얼마나? 2분, 2시간, 50년? 그건 중요하지 않다”며 삶에 대한 열망과 쾌감을 고백한다. 기승전결의 뚜렷한 줄거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다소 밋밋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는 거장의 묵직한 문장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깊이 있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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