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비백인 여성’ 첫 노벨상… 45년간 진행한 인터뷰 8건 묶어
현실 그대로 되비쳐 폭력성 고발… 작품에 얽힌 내밀한 이야기 담아
◇토니 모리슨의 말/토니 모리슨 지음·이다희 옮김/212쪽·1만7000원·마음산책
“학계도 역사도 텍스트, 예술, 문학 담론의 중심에 흑인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1993년 비백인 여성으로 처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흑인 작가 토니 모리슨(1931∼2019)은 1990년 미국 공영방송 PB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문단에서 ‘유령’ 같은 존재였던 흑인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흑인들은 이름 없이 늘 ‘깜둥이’, ‘노예’, ‘흑인’이라고 설명돼야 했다. 언제나 수식어가 필요했던 것”이라며 미국 문학에서 흑인에 대한 이해가 빈곤했음을 지적했다.
신간은 저자가 미국 랜덤하우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할 당시인 1973년부터 타계 1년 전인 2018년까지 총 8건의 인터뷰를 묶은 것이다. 저자는 생전에 ‘가장 푸른 눈’, ‘술라’, ‘솔로몬의 노래’, ‘빌러비드(Beloved)’ 등의 작품을 통해 폭력과 약탈에 시달려온 흑인의 역사를 독창적 상상력과 시적인 언어로 풀어냈다. 인터뷰집에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가장이던 모리슨의 내밀한 삶이 담겨 있다.
평소 모리슨의 소설을 즐겨 읽는 팬이라면 신간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데뷔작 ‘가장 푸른 눈’의 주인공 피콜라 브리드러브에 대해 저자는 “이른바 백인 남성의 ‘주인 서사(Master Narrative)’에 굴복당했다”고 말한다. 자기 외모를 부정하는 흑인 소녀 피콜라가 금발 머리, 푸른 눈이라는 백인의 미적 기준에 자신을 가두며 파멸하기 때문이다.
노예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딸을 살해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빌러비드’는 극심한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룬다. ‘소중한 내 아이들이 나처럼 노예로 살도록 둘 것인가, 아니면 보내줄 것인가.’ 1988년 작가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이 소설은 미국 켄터키주에서 탈주한 여성 노예 마거릿 가너의 실화를 기반으로 쓰였다. 모리슨은 가너의 기사를 보고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완성했다. “엄마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유일한 사람은 죽은 자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살해당한 딸 ‘빌러비드’가 유령으로 소설에 등장한 배경이다.
저자가 랜덤하우스에서 편집한 책 ‘더 블랙 북(The Black Book)’의 제작 과정도 흥미롭다. 이 책은 ‘검둥이 공개 매매’를 알리는 광고 포스터부터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19세기 요리 ‘턴 머시’ 레시피까지 다양한 흑인의 역사를 다룬 스크랩북이다. 흑인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인종차별을 고발하겠다는 모리슨의 철학이 담겼다. “같은 흑인만이 흑인의 분노와 답답함, 끈질긴 희망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아시아 여성 중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은 최근 강연에서 자기 문학의 근원이 ‘사랑’임을 강조했다. “사랑은 삶을 당당한 것, 당당한 사건으로 만든다”는 저자의 메시지와도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둘 다 폭력에 희생된 개인의 내면을 다뤘다는 공통점도 있다. 흑인 공동체가 겪어야 했던 참혹함을 마주하며 이들의 연대에 담긴 사랑을 포착한 저자의 목소리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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