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田知事急遽上京
漸次擴大되는慶南道廳移轉反對
날로 격렬해지는 도청 이전 반대 운동
총독 초전에 의해 화전 지사 급히 상경
◇晋州에서 特派員 金東進 發電
13일
오후, 시위운동대는 부산 방면과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남선교(南船橋)를 파괴하려는 계획으로 행렬을 지어 이동했다. 그러나 이를
경비하던 경찰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방향을 돌려 면(面) 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하니, 소원(小員)들이 모두
사직서를 제출하여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위대는 이에 환호성을 지르며 군청으로 이동하여, 직원들에게 사직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은 관리 신분상 사직은 어렵고, 휴직은 고려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이후,
시위대는 다시 도청으로 몰려들었으나, 경찰들이 문을 굳게 닫고 응대하지 않아 일시적인 혼란이 발생했다. 더는 돌파구를 찾지 못한
시위대는 화전 지사 관저로 몰려가 오후 4시까지 지사와의 교섭 결과를 기다렸다. 마침내 지사는 “즉시 상경하여 가능한 한 시민의
충의를 전달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지사의 답변이 미흡하다며 함성을 질렀으나, 위원들의 중재로 진정되었다.
그
후 시위대는 비상종(非常鐘)을 울리며 공원으로 이동해 위원장의 보고를 들었다. 이들은 도청 이전이 예정된 내년 4월까지 반대
운동을 지속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진주좌(晋州座)로 향해 연설회를 개최하며 부산일보,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의 신문을 보지 않기로
결의한 후, 밤 8시부터는 달빛을 등지고 시위 행렬을 이어갔다. 화전 도지사는 형세가 점점 험악해짐에 따라 총독의 초전에 의해
14일 오전 1시 급히 상경하게 되었다.
◇食糧供給을拒絶
부산으로 가는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다
진주시민회는
매일 평균 550석가량의 백미를 부산 시민에게 공급해왔으나, 13일부터 이를 중단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운수조합과 노동공제회
역시 부산으로 가는 화물의 운송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상인단도 부산과의 거래를 전면 중단하기로 하였다.
평소 진주 장날의 거래액은 평균 17만 원이었고, 연말에는 20만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3일 장날에는 모든 거래가 중단되고 시민들은 도청 이전 반대 운동에만 열중하였다.
◇差別이 可痛
부산이 조선인의 도시라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위원장 김갑순(金甲淳)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운동은 단지 생계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조선인을 차별하는 데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부산이 조선인이 주도하는
곳이라면 이렇게까지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상황이 나빠지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조상이 물려준 이곳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도청 이전이 현실화된다면 진주에 300가구를 수용할 시설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日本人團을 勸誘
조선인이 주도하는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진주 경찰 당국은 일본인 간부들에게 조선인이 주도하는 이번 운동에 공조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그들은 이를 무시했다는 소문이 있다.
◇繼續되는 赤旗 示威
붉은 깃발을 들고 계속되는 시위
14일
오후에도 시위대는 붉은 깃발을 들고 시위를 이어갔다. 깃발에는 “혈성대(血誠隊)”, “세금불납동맹(稅金不納同盟)” 등 여러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시위대는 남강 다리로 몰려나갔으나, 화물 운송은 전면 중단되어 시가는 죽은 듯한 정적 속에서 시위 행렬만
이어졌다.
◇無可奈何
내무부장의 말
시도 내무부장은 “시민들에게 동정은 하나, 이미 결정된 일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다른 대책을 고려 중”이라며 시민을 위로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
◇馬山도 決死的 反對
시민대회를 열고 반대 결의
마산(馬山)에서도 도청 이전 반대 운동이 진행되었다. 13일 시민대회에서 “도민 다수의 복리를 무시한 도청 이전은 결사적으로 반대해야 한다”는 결의가 채택되었고, 이후 마산 시내 곳곳에 전단이 배포되었다.
13일 오후 2시, 신마산소학교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수백 명이 결사 반대를 외치며 열띤 연설을 이어갔다. 이어 오후 4시에 열린 제2차 대회에서는 실행위원을 선출하고 결의문을 채택한 후 폐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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