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자본 축적한 여성들, 정치·사회 변화 최전선에 서다

  • 주간동아
  • 입력 2024년 12월 25일 12시 02분


[김재준의 다빈치스쿨] 어릴 적 예술교육에서 싹튼 감수성이 날카로운 감시와 저항 에너지로 변모

오래전 미국 실리콘밸리 중심인 스탠퍼드대에서 연구년을 보냈는데, 경제학 과목보다 사회학 과목을 더 많이 청강했다. 우연히 들은 마크 그라노베터 스탠퍼드대 교수의 경제사회학 강의가 경제학에 찌든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꾼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당시 “경제학은 진부한 썩은 고기를 놓고 현란한 기술을 뽐내는 요리사와 같다. 사회학은 기술은 다소 떨어질 수 있지만, 신선한 재료를 가지고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말에 반감이 들면서도 또 공감했다. 이후 사회학 공부를 열심히 했고, 덕분에 7편 넘는 사회학 논문을 전문 학술지에 낼 수 있었다. 스타벅스가 많은 곳에 왜 첨단기술 기업이 많은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이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등에 대한 답을 구하는 체험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12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를 열고 있다. [동아DB]
12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를 열고 있다. [동아DB]
결혼자본의 변신

이번에는 사회학자 눈으로 본 한국 사회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한국 사회에서 공연장을 가득 채우고, 정치 집회에서 힘찬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놀랍게도 2030 여성이다. 외국의 경우 나이 든 중산층이 공연장에 많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여성이 문화적·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배경에는 조기 예술교육과 문화자본이라는 키워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 예술교육은 유독 여자아이에게 집중됐다. 많은 여자아이가 피아노와 발레를 배우고 미술학원에 다녔다. 예술교육은 부모에게 “딸을 잘 키웠다”는 자부심이 됐고, 결혼할 때 ‘교양 있는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문화적 소양이 미래를 위한 ‘결혼자본’의 일부로 작동한 것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을 빌리자면 예술교육은 단순 취미를 넘어서는, 특정 계층과 교양을 상징하는 자산이었다. 관련 논의는 최샛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의 논문에 잘 정리돼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예술교육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문화적 자산을 결혼시장에 내놓는 것 이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여성들에게 결혼의 중요성은 예전 같지 않다. 문화자본은 여성이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고,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어린 시절 예술을 배우고 문화적 감각을 익힌 여성은 자연스럽게 공연장 등 문화공간으로 향했다. 뮤지컬, 클래식 공연, K팝 콘서트, 미술 전시의 관객은 대부분 2030 여성이다. 그들은 문화를 소비하는 동시에 문화 흐름을 만드는 주체가 됐다. 그동안 여성을 수동적 존재를 만들기 위해 작용했던 교양과 문화가 오히려 그들을 능동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로 변화시킨 것이다. 문화 공간을 가득 채운 여성들은 문화를 즐기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며 그 자체로 한국 문화산업의 중심축이 됐다. 오늘날 그들은 관객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단순 소비자에서 주체적 참여자로

흥미로운 점은 여성의 에너지가 문화 소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화자본을 축적한 여성들은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문화 체험과 예술교육을 통해 키운 섬세한 감수성은 정치적·사회적 이슈에서 날카로운 감시와 저항의 에너지로 변모했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여성 인권운동, 젠더 이슈 집회에서 2030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최근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서도 젊은 여성들은 정치·사회 변화의 최전선에 섰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정보를 공유하고 굿즈와 간식을 나누며 응원봉을 흔들면서 소녀시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K팝 팬덤이 집회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외신도 이 같은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BBC코리아에 따르면 이른바 여의도 탄핵 집회에서도 20대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졌다(표 참조). 여성들이 ‘단순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사회를 바꾸는 ‘주체’가 된 것이다. 새로운 정치 소비자들은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데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촌스러운 정치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더 나아가 사회학자들은 정치도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회학자 언어로 표현하자면 결혼자본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주어졌던 문화적 교양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공연장에서 문화를 즐기고 광장에서 변화를 외치는 젊은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을 상징한다. 이들은 더는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한국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가 된 것도 여성들의 합리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 정책은 시작부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젊은 여성들은 보조금 몇 푼에 움직이지 않는다.

여성들이 쌓은 문화자본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한국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공연장은 물론, 광장에서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체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이 흐름은 단순히 시대 트렌드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70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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