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 달 살기 바람이 몇 년째 가실 줄 모른다. 살아 본 사람들의 경험을 담은 책과 유튜브 프로그램은 수십 권, 수십 건이다. 바다 건너 섬 생활 이야기가 이웃 마을 ‘맘 카페’ 댓글 보듯 가깝다. 제주가 익숙해진 것 같다. 그걸로 충분한 걸까.
누구 말대로 제주는 언제나 ‘낯선 이상향’으로 남았으면 한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기. 처음인 듯한 경관에 푹 빠지기. 아무 생각 없이 게으름 피우기. 소진된 ‘항마력(降魔力·생활 속 부끄러움이나 역겨움을 견디는 힘)’ 충전하기. 조금 치유된 나를 만나기. 그런 곳 말이다.
● ‘바람이 분다, 말이 달린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성이시돌목장에 바람이 거세다. 일본 문화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치의 ‘제주도’(김종철 옮김, 여름언덕, 2014년)에 따르면 겨울바람은 영등할망이 만든다. 영등바람이라고도 하는 신풍(新風)이 (음력) 정월 보름에 바다를 건너와 2월 보름에 돌아간다. 동쪽 끝 우도(牛島) 전설은 ‘매우 광포한 신 영등할망을 잘 모시지 않으면 폭풍이 인다’고 전한다.
물론 영등할망 올 때가 아니어도 제주 바람은 억세다. 누구는 “영문도 모른 채 바람이 분다. 방향도 수백 번 바뀐다”고 했다. ‘한라산 산신(山神)은 육지에서처럼 범(虎)이 아니라 바람과 돌의 상징인 듯하다’는 이즈미의 해석은 맞을 것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는지 모르는 바람 속에서 말들이 330만 ㎡(약 100만 평) 초지(草地)를 거닌다. 겅중겅중 달린다. 고려 삼별초가 패망한 1273년 이후 몽골은 말 160필을 가져다 놓고 제주도를 목마장(牧馬場)으로 삼았다. 20세기 들어서까지 마을 공동으로 말을 방목했지만 지금은 대개 경주마를 기른다.
이 목장 말도 26세 먹은 종마(種馬) ‘액톤 파크’가 뿌린 경주용 서러브레드(thoroughbred)다. 경주용 말은 2∼3세에 경주를 시작한다. 전국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의 80%가 제주산이다. 선수 경력은 길어야 5년. 보통 7세에 은퇴한다.
이곳에는 경주마 ‘유치원’과 ‘고등학교’가 있고 은퇴한 경주마가 풀을 뜯으며 여생을 보내는 ‘요양원’도 있다. 19세, 17세, 15세, 10세, 네 마리다. 매년 전국에서 2000마리 정도 태어나고 1500여 마리가 은퇴한다. 은퇴한 말의 생사는 잘 파악되지 않는다. 이 목장이 한국마사회와 ‘은퇴마’ 돌봄 프로젝트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성이시돌목장은 1953년 아일랜드에서 온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1928∼2018) 신부가 중산간(해발 200∼500m 지역) 땅을 개발한 것이다. 이시돌(Isidore·1110∼1170)은 스페인 농노 출신 가톨릭 사제로 농부의 수호성인이다. ‘제주 기업 목축의 본보기’인 이곳에는 당연히 소도 있고 양도 있다. 목장 쉼터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농약 안 친 풀을 먹고 자란 젖소가 우유를 만든다. 유기농 우유가 일반 우유보다 영양성분이 더 많지는 않단다. 브런치 카페에서는 제주 메밀로 만든 갈레트(galette)를 판다. 프랑스에서는 흔히 베이컨을 넣는데 여기서는 제주 해산물로도 만든다.
● ‘계절은 이렇게 내리고, 그렇게 머문다’
이즈미의 ‘제주도’나 1983년 ‘뿌리깊은 나무’에서 출간한 ‘한국의 발견―제주도’에서 차(茶)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연간 차 생산량 아시아 1위다. 그만큼 차 재배 농민이 많고 차 수준도 높다. 제주 토종 꽃차도 40여 종이다.
계절이 돌아오듯 ‘물이 돌아오는 곳’이라는 뜻의 서귀포시 회수(回水)동에 차와 다식(茶食)을 맛볼 수 있는 ‘회수다옥’이 있다. 주인장 부모가 32년 전 세워 탐라대생들 하숙을 치거나 펜션으로 쓰다가, 학교가 없어진 뒤 폐가가 되다시피 한 집을 헐고 다시 지었다.
이곳에서는 ‘맡김차림’을 음미해 봐야 한다. 주인 서경애 씨(55)는 보이차 우롱차 말차 같은 수입차 위주의 이른바 ‘티마카세(티·tea+오마카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산 차 5종과 제주 밭작물로 만든 다식으로 맡김차림을 만들었다.
메뉴는 정해진 것 없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 이런 식이다. 은은한 코코넛 맛 무화과잎차로 입을 가신다. 딴 찻잎을 실내와 실외, 양지와 음지에서 말리고 덖지는 않은 백차를 3분간 우려 마신다. 3분은 작은 모래시계로 잰다. 다음은 차 원물(原物)을 꽃과 함께 24시간가량 놔둬 향을 입힌 차꽃홍차다. 이후 녹차를 섭씨 200도 강불에 40분가량 덖어 산화를 최소화해 떫은맛을 뺀 제주덖음차로 입안을 정돈한다. 그리고 카페인 없는 구절초로 마무리. 요즘은 그늘에서만 재배한 어린 찻잎을 쓴 첫물말차로 만든 첫물말차라테가 나온다. 차 사이사이 녹두 곶감 유자 감귤 당근 등 사시사철 제주 작물로 만든 다식과 떡이 차 맛을 일깨운다.
손님 앞에서 차를 직접 우려내는 팽주(烹主)에게서 그 차 이야기를 들으며 맛과 향을 들이켜다 보면 ‘계절은 이렇게 내린다’는 노랫말이 와닿는다. 계절이 차를 통해 내 몸에 내려와 한동안 머문다.
계절을 잡아채는 것은 차만이 아니다. 천연염색으로 제주 셔츠를 만드는 ‘씬오브제주(Scene of Jeju)’에서 체험해 보자. 철가루 물에 20분가량 담가 놓는 전처리를 한 에코백에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억새를 올려놓는다. 쇠봉에 둘둘 말고 랩을 씌워 묶은 뒤 찐다. 열에 잎의 탄닌 성분이 반응해 유칼립투스가 새겨지고 억새도 희미하게 자취를 남긴다.
● ‘제주 사람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산다’
‘한국의 발견―제주도’에 이런 문장이 있다. ‘참새만큼 흔한 텃새인 동박새는 늦겨울 붉게 핀 동백꽃을 찾아 한라산 골짜기를 떠나 마을에 내려오는데, 동박새가 “호오개교옥” 하고 울 적마다 동백꽃이 한 송이씩 피어나고….’
동박새가 내려오는 마을이 남원읍 신림리 동백마을이다. 주민 560여 명 가운데 530명이 감귤 농사를 짓는데 농사 아닌 무언가를 해보자는 생각에 2007년부터 동백나무 400그루를 심었다. 아예 동백과 인연이 없지는 않았다. 1706년, 이 마을에 처음으로 이주해 온 광산 김씨 집 둘레에 동백나무가 심겨 있었다. 제주도 지방기념물 27호 동백군락지가 이곳에 있는 연유다.
동백 씨앗으로는 기름을 짜서 먹거나 피부에 바른다. 토종 동백 씨앗만 먹을 수 있다. 동네 할망들이 씨앗을 모아 오면 돈을 쳐 준다. 씨앗을 씻고 말려 성한 것을 골라 200도에서 30분간 초벌 볶는다. 씨앗 한 통을 짜면 기름이 2L가량 나온다. 방금 짠 기름을 마셔 봤다.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다. 한때 참기름 대신 식용으로 쓰자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를 알겠다. 마을 ‘동백마을 방앗간’에서는 동백기름을 쓴 비빔밥도 먹을 수 있다.
동백꽃은 한 나무에서도 피는 시기가 다 다르다. 이쪽 가지에서 피었다가 지면 저쪽 가지에서 피어난다. 비슷한 광경을 ‘해비치호텔&리조트 제주’ 다크룸이라는 공간에서도 볼 수 있다. 주로 움직이는 미지의 기계 생명체를 쇠로 만드는 최우람 작가의 ‘Una Lumino Callidus Spiritus(하나의 빛, 영리한 영혼)’이다. 따개비 군집이지만 입을 다물었다가 하나씩 순차적으로 여닫으며 빛을 내는 모습은 동백꽃의 피고 짐을 연상케 한다.
겨울 해비치호텔&리조트 제주에서는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해발 342m 따라비 오름을 탐방하거나 동백마을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아침에는 자전거로 표선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달릴 수도 있다. 게으름을 뜻하는 제주말 ‘간세’를 되새기며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어디 가나 보이는 수평선이 당신의 동반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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