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100주년/단편소설 당선작]어떤 진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1일 01시 40분


박진호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아줌마 알아보겠니?”로 시작하는 말씨가 이렇게 부드러울 줄은 몰랐다. 지우 엄마의 인상은 교장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내 왼팔을 잡은 손의 세기며 눈썹을 한껏 오므리고 지은 표정까지, 행동 하나하나에 상냥함이 배어 있었다. 그렇다고 저 질문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우린 오늘 처음 본 사이였으니까. 지우는 나를 집에 데려간 적도, 지우 엄마가 나를 찾아온 적도 없었다. 지우와 연락이 끊긴 게 벌써 오 년 전이었다. 맥락 없는 이 친근함이 영 어색했고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고 말았다.

“갑작스러워서 석현이가 놀랐나 봅니다. 지우는 기억나지? 초등학교 때 둘이 그렇게 붙어 다녔다면서?”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교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 교장실은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낸 협상 테이블 같은 분위기였다. 커다란 원목 탁자를 중심으로 나와 가까운 쪽에는 지우 엄마가, 맞은편에는 교장과 담임이 앉아 있었다. 담임은 언제라도 맞장구칠 준비가 됐다는 듯이 지우 엄마와 교장을 번갈아 살폈다. 나는 자꾸만 지우 엄마의 등 뒤에 놓인 종이 쇼핑백 두 개에 눈이 갔다. 겉면에는 알파벳 두 개를 엇갈려 포갠 모양의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아줌마가 예전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만 찾아다니느라 좀 늦었어. 네가 여기 다니는 줄 진작 알았으면 올봄에라도 왔을 텐데… 지우가 널 많이 보고 싶어 해.”

지우 엄마는 지우의 전학이 이미 결정된 것처럼 말했다. 나는 계속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학교로 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려면 엄마 아빠의 이혼 이야기부터 해야 했는데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은 여기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지만 내 경계심을 슬며시 파고든 지우 엄마의 다정한 말투도 한몫했다. 여긴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부탁과 거절이 오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래서는 어제 담임과 만나 미리 입을 맞춰 놓은 게 의미가 없었다.

담임이 상담실로 날 부른 건 어제가 두 번째였다. 이번엔 시험 문제라도 알려주려는 걸까 내심 기대하며 상담실 문을 열었다. 그래서 담임이 꺼낸 ‘지우’의 이름을 내가 알고 있는 지우의 얼굴과 연결시키는 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전학 오면 우리 반에 배정받길 원한다는데, 지우가 자폐증이 있는 건 알고 있지?”

담임은 내가 지우의 상태를 알고 있는지부터 살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지우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거의 삼 년을 같은 반에서 붙어 지냈으니까.

“이사회랑 교장 선생님까지는 이야기가 다 된 것 같아. 그래도 당사자인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꼭 나를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을 거다. 일반 고등학교에서 자폐 학생을 담임으로 맡는다는 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조금 별난 사이였던 건 맞지만 서로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다가도 다른 반이 되면 금방 서먹해지는 게 초등학생들의 우정이었으니까. 오 년 사이 내 머리도 너무 커진 데다 무엇보다 내게는 지우를 환대해야 할 마음의 부채가 없었다. 어쨌든 이사회 이야기까지 나온 걸 보면 담임이 어찌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닌 게 분명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하고. 선생님 말 이해하지?”

담임은 이번에도 입단속을 잊지 않았다. 내가 같은 편임을 확인한 후엔 우리가 함께 취해야 할 태도를 공유했다. 대단한 계획은 아니었다. 지우 엄마가 다시 학교를 방문하기로 한 오늘, 담임이 교장실로 나를 부르면 지우 엄마와 교장 앞에서 내 의견을 말하기만 하면 됐다. 상황과 분위기는 담임이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러니 이제 담임이 나서줄 타이밍이었다.

“내년 2학년부터는 선택과목 따라서 각자 이동수업을 하게 될 테니 사실 반이라는 게 큰 의미가 없어지거든요. 미리 적응도 할 겸 지금부터 다른 반에 가는 것도 고려해 보시죠. 이 문제는 석현이 생각이 가장 중요하기도 하구요.”

담임이 말을 꺼내자 교장이 못마땅해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지우 엄마는 진짜 협상 상대가 누구인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아, 하며 내게 얼굴을 돌렸다.

판은 다 깔렸고 나는 에둘러 거절 의사만 표하면 됐다. 그런데 준비한 말보다는 다른 질문들이 계속 입에 맴돌았다. 지우는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났던 건지. 가기 전에 내게 연락 한 번 할 생각은 못 했던 건지. 시나리오에 없는 질문들이 뒤죽박죽 섞여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담임도 지우 엄마도 서로가 기대한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자 당황한 얼굴이었다. 때마침 5교시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석현이는 먼저 보낼까요? 아줌마가 다음 주에 다시 서울에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날 선생님들 모시고 천천히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그렇게 하시죠. 석현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들어 보도록 하구요.”

교장은 내게 가보라는 손짓을 하고 다시 지우 엄마를 향해 몸을 틀었다. 세 명이 앉은 자리엔 내가 낄 틈이 보이지 않았다.

교장실을 나와 문 옆에 기대앉았다. 담임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도 궁금했지만 나를 빼고 하려는 말이 뭔지도 알고 싶었다. 조금 열어둔 문틈 사이로 교장과 지우 엄마의 웃음소리가 차례로 들렸다.

“지우가 자폐성 장애 2급이긴 해도 병원에선 3급에 준하는 수준이라고도 하더라구요. 수업 시간에도 차분한 편이니 옆에 석현이만 있으면 걱정하시는 것만큼 도움이 많이 필요하진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지우 엄마가 등 뒤에 뒀던 쇼핑백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교장이 이어 말했다. 작은 성의 표시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안 그래도 이사장님이 발전기금에 대해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곧 지우가 다닐 학교인데 제가 더 감사하죠. 지우 엄마와 교장은 서로 짜맞춘 대본을 읽는 것처럼 두어 차례 더 말을 주고받았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일어나 교실 쪽으로 움직였다. 내 걸음 소리만 복도에 울려 퍼졌다. 걱정하시는 것만큼 도움이 필요하진 않을 거예요. 지우 엄마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지우는 이제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 걸까.

지우와 처음 같은 반을 하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선의였는지 호기심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지우의 알림장을 대신 써주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시간이 부족해 내 것은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사업 일이 바빴던 아빠와 엄마는 내 부실한 알림장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문제가 되진 않았다. 지우의 가방에는 언제나 준비물이 넉넉했고 나는 그걸 쓰면 됐으니까. 지우는 교실에서든 운동장에서든 멍하니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지우는 목을 앞으로 쭉 빼고 긴장한 것처럼 턱을 당긴 자세로 걸어 다녔다. 여기에 키까지 무척 커서 애들 사이에 서 있으면 이쑤시개 통에 잘못 끼워진 빨대처럼 보였다. 가끔 돌발적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팔을 휘저으며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짓궂은 애들이 지우의 행동을 따라 하며 놀렸지만 큰 체격 탓에 주변만 맴돌다 도망가는 게 다였다. 학교 애들 모두 ‘자폐’라는 단어를 배우기도 전에 지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익숙함만큼이나 지우도 주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친구들이 쓰고 온 우산 모양이나 화단에 앉은 참새 수 같은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일방적이었고 여기에 응해주는 건 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지우를 따라 책상이나 운동장 바닥, 그것도 아니면 허공 어딘가를 보며 대화했다.

이 지루한 문답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언젠가 고전영화 채널에서 봤던 영화 ‘레인 맨’ 덕분이었다. 자폐증이 있는 형의 천재적인 기억력을 이용해 도박을 하려던 주인공이 점차 마음을 열고 형제애를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처럼, 나도 지우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해 남다른 우정을 맺고 싶었다. 지우가 암산은커녕 세 자릿수 덧셈도 힘들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의 환상을 포기하지 못했다. 우리가 같은 반을 했던 3학년부터 5학년까지 담임을 맡은 선생님들은 우리를 짝으로 묶어두면 편해진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지우에겐 규칙들이 많았다. 줄을 설 땐 무조건 맨 끝줄에 서야 한다든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뒤엔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쉿 하고 바닥을 내려본다든가 하는. 특히 무언가 원하는 게 생기면 말끝에 ‘필요해’를 붙였다. 그러곤 몸을 숙여 상대를 크게 안은 후 턱으로 날개뼈 근처를 지그시 눌렀다. 이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에는 누군가 반복해서 가르친 흔적이 묻어 있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며 아쉬운 일이 생겼을 땐 적절히 인사를 전해야 한다는 약속. 그 연습된 태도에선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 거리감은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나설 때 더 또렷해졌다.

지우가 살던 아파트 단지는 학교 바로 근처에 있었고 우리는 항상 지우네 아파트 단지 입구 앞에서 헤어졌다. 지우와 같이 아파트 동 앞까지 따라가려 하면 지우는 내 앞을 단호하게 막아섰다. 엄마가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한댔어. 집에 갈 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방학 기간에도 연락 한 번 없이 혼자 지내다 오는 게 지우의 또 다른 암묵적 규칙이었다. 5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어진 우리의 관계는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끈끈했다. 그래서였을까.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교실에서 지우의 빈자리를 처음 확인했을 때도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내가 닿지 못하는 지우만의 영역이 있을 거라 짐작하면서.

지우의 갑작스러운 전학 이후, 학교에 있는 그 누구도 지우의 행방을 묻거나 알려주지 않았다. 생각보다 나는 지우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

보충수업 시작 전까지 눈을 붙이려고 책상에 엎드렸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석식으로 먹은 돈가스가 얹혔는지 속이 더부룩했다. 저녁 시간 식당은 한산한 편이어서 오늘처럼 메뉴가 괜찮은 날엔 아주머니들이 돌아다니면서 반찬을 더 나눠주곤 했다.

7교시 이후에도 학교에 남아 석식을 먹는 건 보통 두 부류였다. 보충수업까지 듣고 저녁 늦게 학원에 가려는 애들과 학원을 가지 않는 애들. 학원을 가지 않는 애들 중에서도 자의로 가지 않는 쪽과 나처럼 가지 못하는 쪽으로 한 번 더 나눌 수 있지만, 후자는 어차피 몇 명 없었다. 그 몇 명이 누군지는 뒤통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잔뜩 졸아든 어깨 뒤로 풍기는 가난의 냄새. 나는 그 무리와 웬만하면 떨어져 앉았다. 굳이 저 처량함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달리 생각해 보면 가난도 충분히 써먹을 데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우리 같은 애들을 위해 석식비 지원에 보충 수업료와 자율학습실 이용료까지 면제해 줬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한부모 가족 지원도 알아봤지만 빡빡한 인정 기준에 비해 쓸 만한 혜택은 별로 없어 신청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선 학교 프로그램만 이용해도 두 끼 식사와 공부 환경까지 제공되니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그럴듯한 지원을 받으려면 찢어지게 가난해야 했고 우리의 가난은 거기에 비비기에 좀 어정쩡했다.

종례 시간 때 담임의 행동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담임은 종례를 마치자마자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장실에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는 약속했던 말을 하지 못했으니 엄밀히 따지면 내 탓이 컸고, 발전기금 이야기가 나온 이상 담임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을 거다. 그렇다 해도 하루 만에 태도를 바꾸는 담임을 보니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지우와 다시 학교생활을 하게 되는 걸까. 내 상황 때문이든 뒤늦게 찾아온 서운함 때문이든 지우와의 재회가 부담되는 건 변하지 않았다. 지우 엄마가 다시 찾아오기로 한 다음 주까지 시간은 있었다. 교장과 담임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아까 전 지우 엄마의 표정을 떠올리면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얹힌 돈가스가 되올라 왔는지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다들 그만 자고 수업하자.”

언제 들어왔는지 수학이 애들을 깨웠다. 오늘도 수학은 교실을 돌며 잠이 덜 깬 애들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의 느낌이 별로였지만 싫은 티는 내지 않았다.

수학은 요즘 내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상대였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젊은 나이임에도 학생들에게 그다지 살가운 편이 아니었다. 교사로서 어떤 신념이 있는 건지 사람이 좀 깐깐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기 위해 감정적인 관심을 일부러 잘라낸 느낌이랄까. 이런 점에서는 담임처럼 나이가 좀 있는 꼰대들의 마음을 사는 게 훨씬 쉬웠다. 꼰대들은 대체로 눈빛부터 달랐다. 마음이 꺾이고 생기 없이 찌든 눈. 학생들에게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다는 무력한 의지를 온몸으로 뿜어냈다. 그 마음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모두가 엎드려 자거나 학원 문제지를 풀고 있을 때 나 하나만큼은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는 티만 내주면 꼰대들의 태도는 의심에서 호의로 금방 변했다. 쉬는 시간에 찾아가 대답하기 수월한 질문 몇 개 던지고 깨달음을 얻은 듯 ‘아!’ 한마디 외쳐주면 효과가 더 좋았다. 가끔 이 단계에서도 마음을 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내 개인사를 흘려주면 게임은 끝났다. 불우한
이혼가정 환경과 모범생의 조합은 절대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이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거래였다. 꼰대들에겐 교사로서 잃어버렸던 자존감을 되찾아주고 나는 그 대가로 여러 종류의 호의를 얻었으니까. 지난 학기 내신 전교 4등은 내 힘만으로 이뤄낸 게 아니었다. 특히 담임의 역할이 컸다. 담임이 내 영어 서술형 답안지를 바꿔 주지 않았다면 8점을 그냥 날릴 뻔했다. 기말고사 채점 기간에 상담실로 나를 부른 담임은 ‘이번 한 번만’이라며 가볍게 나무랐다. 그리고 가방에서 내가 제출했던 서술형 답안지와 새로 준비한 답안지를 동시에 꺼내 들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하고. 근엄한 체하는 목소리에 뿌듯함이 섞여 있었다. 담임만이 아니었다. 국어나 과학, 국사 같은 주요 과목들도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를 돕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는 척 시험에 출제된 페이지를 슬쩍 넘겨주거나 출판사에서 받은 개정판 문제집을 선물하면서 나를 지지하고 있음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단 한 명, 수학만 빼고.

“시험 한 달 남았다. 졸지 말고.”

눈을 반짝여 보기도, 적절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하면서 교감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수학은 내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는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애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하지만 내 개인사는 이미 선생님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인 데다 지금까지 파악한 수학의 성격이라면 큰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뭔가 더 구체적이고 극적인 게 필요했다. 아들을 위해 맨바닥에서 수소문하며 나를 찾아온 지우 엄마의 이야기처럼 감정 깊숙한 곳을 건드릴 만한 사연, 뭐 그런 것들.

아쉽게도 그런 감동을 자아내기에 우리 가족의 내막은 좀 이성적이고 메마른 편이었다.

내 중학교 첫 성적표를 보고 아빠가 했던 말이 있다.

점수가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표기되는 거 보이지. 0.01점 차이로 등수가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야. 지금이야 전교에 몇백 명 안 되지만 고등학교 가서 전국에 있는 학생들이랑 경쟁한다고 생각해 봐. 1점만 떨어져도 네 앞에 백 명이 넘게 있는 거야.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평균 92.42점이 높은 점수인지 낮은 점수인지는 아빠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94점과 98점을 받은 음악과 미술에는 힘 쏟을 필요가 없음을, 90점을 겨우 넘긴 수학에는 더 집중해야 함을 강조했다. 최선의 수를 계산하고 전략적으로 선택할 것. 이혼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빠와 엄마는 나를 앉혀 두고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일렀다. 아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략적 이혼, 쉽게 말하면 위장 이혼이었다.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두 번째 해부터였다. 함께 사업 일을 돕던 엄마는 더 이상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아빠가 수척해질수록 엄마는 사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대신 두 사람은 늦은 밤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무언가 비밀스런 대화를 나눴다. 시간이 갈수록 집 안 가구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거실에 소파 하나만 남은 그해 겨울,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다.

어떤 이혼은 가족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가족은 물론 재산까지도. 하지만 엄마와 내가 지낼 전셋집을 찾기 위해선 자꾸만 후미지고 경사진 동네로 들어가야 했다. 방 두 개짜리 낡은 전셋집 골목 앞엔 아빠를 찾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서성였다. 그들이 믿든 말든 엄마는 아빠의 사업과 아무 관련 없는 순진한 가정주부여야만 했고, 그러니 책임질 것도 없었다. 이 사실이 그들을 더 화나게 했지만 엄마는 표정을 지우는 법을 빠르게 익혔다.

대개 불우함의 여부는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결정된다. 그런 소문들이 아주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엄마와 내게 남은 건 전셋집에 묶인 돈뿐이었고 아빠는 숨어 지내야 했으니까. 한 달에 한 번 아빠를 만나러 나설 때면 뒤에 누가 따라붙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우리는 집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수도권의 프랜차이즈 카페를 전전했다. 엄마는 일하는 마트에서 챙긴 조리식품으로 아빠 도시락을 쌌고 가끔 현금이 든 봉투를 도시락통에 함께 넣었다.

이 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아빠의 흔적을 찾아온 사람들을 골목에서 마주쳤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눈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럴 때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면 동정인지 경멸인지 모를 얼굴을 하곤 금세 자리를 떠났다. 아빠와 엄마가 이혼으로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단지 최악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면, 그리고 아는 얼굴 하나 없는 동네의 고등학교에서 지금까지 얻어낸 호의들을 생각하면 썩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같은 전략이 앞으로도 먹힐 거란 보장은 없었다. 이혼가정의 상처처럼 진부한 신파가 또 없으니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덤덤하게 지내다 툭, 무심결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진짜 사연일지도 모른다. 그게 어떤 진심에서 나온 것이든, 나는 아빠보다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

지우 엄마가 다시 오겠다던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담임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먼저 찾아가 상황을 물어볼까 고민했지만 며칠 전 담임이 입고 온 새 재킷을 보고 그만두었다. 감색 재킷의 가슴 주머니엔 작은 금속 핀이 달려 있었고 담임이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받아 반짝였다. 지난번 지우 엄마가 가져온 쇼핑백에도 새겨져 있던, 알파벳 두 개가 포개진 모양의 브랜드 로고였다.

어느 편인지 모호한 상대에게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3주 후면 벌써 2학기 중간고사였다. 수업과 수업 사이, 보충수업 이후 밤 열 시 반까지 이어지는 자율학습. 이때가 순수하게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해선 아빠를 찾아온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곧바로 불을 꺼야 했다. 지금부터 내신을 준비하지 않으면 시간이 빠듯했다.

이백 석 정도 되는 자율학습실 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낡은 독서대에서 여러 번 덧칠한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다. 감독을 맡은 과학이 출입문 쪽 의자에 앉아 코를 골았고 이따금 누군가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한참 전부터 펼쳐놨던 수학 문제집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문제를 벌써 세 번째 틀린 참이었다. 문제 번호 위에 적힌 ‘수능 기출변형’이라는 글씨가 거슬렸다.

수능으로 승부 보는 건 지난 6월 교육청 모의고사 이후 빠르게 포기했다. 원점수로는 교내 20위권이었지만 전국 백분위로 따지면 상위권 학교 기준에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자기 객관화가 꽤 잘되는 편이었다. 괜한 희망의 끈을 붙잡기보단 지금부터 수시 전형에 집중하는 게 현명했다. 다행히 내신 시험은 학교 수업만으로도 충분했고 얼마나 꼼꼼히 준비해 실수를 줄이느냐로 점수가 갈렸다. 학교 장학 지원만 지금처럼 계속 받을 수 있다면 내가 구상할 수 있는 전략의 폭은 좀 더 넓어졌다.

수시 전형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는 총 세 가지 정도였다. 첫 번째는 학교장 추천으로 지원하는 지역 균형 전형. 추천장만 얻어내면 그 이후의 경쟁률은 굉장히 낮다는 게 최대 이점이지만 추천 인원을 두 명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보통은 학교마다 암묵적으로 선발해 놓은 후보들이 있다. 이를테면 내신과 수능성적이 모두 뛰어난 애들. 나는 이 단계에서 걸러질 확률이 크다.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한부모 가정 학생들만 지원할 수 있는 기회균등 전형. 성적이 낮아도 상위권 학교를 쉽게 노려볼 수 있지만 역시나 우리 집의 어정쩡한 가난이 문제였다. 엄마가 마트에서 벌어오는 수입에 전세금까지 더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기준을 충족하기 힘들었다. 엄마의 수입을 줄일 게 아니라면 이 방법은 차선으로 남겨두는 게 맞았다. 그러니 남은 건 일반 수시 전형뿐이었다. 내신 성적과 학생부 기록, 추천서, 면접까지 준비해야 해서 손은 많이 가지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특히 학생부 관리는 3년간의 기록을 쌓는 장기전이기 때문에 일찍 준비할수록 유리했다.

그렇다면 지우의 등장은 오히려 내게 기회였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모범생의 조합, 여기에 장애가 있는 친구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희생정신까지. 평판뿐만 아니라 학생부 기록에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카드였다. 이번 학기도 거의 끝나가고 담임 말처럼 내년부터는 이동수업을 하게 될 테니 지우와 같은 반이 된다 해도 적당히 거리만 둔다면 부담 가질 이유가 없었다. 다만 지우와의 재회가 남들에게는 내 자발적인 선택처럼 보이도록 약간의 연출이 필요했다. 어려운 계획은 아니었다. 내일 바로 담임을 찾아가 바뀐 내 생각을 전한 다음 공공연한 비밀로 퍼지길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듣는 귀가 많은 교무실이야말로 소문을 흘리기 가장 좋은 장소였다. 판을 엎기보단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면 될 일이었다.

총대를 쥐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누군가 밤 10시에 맞춰둔 휴대폰 진동 알람이 울렸다. 과학의 코골이가 멈추고 곧 자습실이 어수선해졌다. 하나둘 가방을 챙겨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계속 붙잡고 있던 수학 문제에 네 번째 오답 표시를 추가했다.

자습실을 나서자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9월이 끝나 가는데도 화단에선 아직 여름 풀냄새가 났다.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 아무 눈치 볼 것 없이 엉덩이만 붙이고 버텨내면 정직하게 도달하는 시간. 밤길을 뚫고 교문을 나서면 늦여름의 기나긴 낮을 이겨낸 기분도 들었다.

막차를 타러 교문 밖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근처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에서 비상등이 깜박였다. 보조석 창문이 내려가고 지우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근처 지나가던 중인데 아줌마가 집까지 태워 줄게.”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했지만 잠시 망설이다 차 문을 열었다. 에어컨을 틀어놨는지 공기가 알맞게 시원했다. 기분 좋게 데워진 가죽시트를 타고 은근한 레몬 방향제 냄새가 올라왔다. 지우 엄마는 다른 일로 서울에 좀 빨리 들르게 됐다며 두서없이 혼잣말을 이어갔다. 내비게이션에 뻗은 손가락이 목적을 잃은 듯 머뭇거렸고 차는 좀처럼 출발하지 못했다.

“대명아파트 앞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내가 먼저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 근처의 아파트 단지 이름을 댔다. 거기서 내려 집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집 위치를 설명하기도 복잡했지만 굳이 사는 동네를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아줌마가 이제 찾아와서 미안해.”

지우 엄마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정돈된 말투였다.

“그때는 지우가 혼자 잘 해내고 있다고, 아줌마는 그렇게 믿고 싶었나 봐. 나나 지우 아빠가 나서지 않아도 일반 애들처럼 친구들도 사귀고 학교생활도 하고 있다고 말이야.”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더 빨리 찾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일까, 아니면 나를 빼놓고 지우의 전학을 결정하려던 일에 대한 사과일까. 운전대를 감아쥔 지우 엄마의 양손에 비로소 안정감이 느껴졌다.

“지우가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건 다 네 덕분이었는데. 왜 그걸 몇 년을 고생한 다음에야 알았을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연이었다. 부산으로의 이직 제안을 받은 지우 아빠와 그 근처에서 발견한 특수학급을 운영하는 학교. 번잡한 서울을 떠나면 지우의 증세도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주변에 알릴 새도 없이 서둘러 내려갔던 과정들. 그 후의 일은 다소 뻔했다. 지우는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이혼가정의 진부함만큼이나 많이 들어봤음 직한 이야기였다.

“내일모레 학교에서 만나면 교장 선생님께 잘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아줌마는 지우가 일반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더 바랄 게 없어. 지우는 네 도움이 필요해.”

진짜 목적은 마지막에 있었고 무엇에 대한 사과였는지는 모호했다. 이 이야기엔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우뿐이었다. 내 역할은 한결같이 주인공을 기다리며 정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게임 NPC에 불과했다.

너무 많이 생략된 이야기는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이 고백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지우와 붙어 다니던 시절, 내게는 늘 비슷한 수군거림이 따라왔다. 쟤가 걔죠? 지우랑 몇 년째 같은 반 하는. 선생님들은 내게도 귀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보통 집 같으면 부모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저 애 부모님이 사업을 해서 학교 일에 신경을 못 쓰나 봐요. 지우네가 봉 하나 잡은 거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영화 ‘레인맨’ 속 감동은 그저 영화적 연출이었음을. 우리가 삼 년 내내 같은 반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엔 지우 엄마가 있었으며, 어떤 요청과 부탁은 회유나 거래라고 바꿔 부를 수 있다는 것도, 내가 지키고 싶었던 환상 뒤엔 복잡한 이해타산이 얽혀 있었다는 것도, 사실은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기특하긴 한데 좀 안타깝네. 수군거림은 보통 비슷한 말로 끝났다. 안타깝게도 그때의 나는 기특하다는 말에 조금 더 취해 있었다.

그사이 차가 멈췄고 창문 밖으로 아파트 단지 입구가 보였다.

“다 도착했네. 여기 맞지?”

지우 엄마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나는 내리지 않았다.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 따뜻한 가죽시트와 레몬 방향제 냄새, 진동 하나 없는 차의 움직임. 이 안에 있는 부드럽고 다정한 모든 것들에 마음이 곤두섰다.

“여기 말고 조금 더 가 주세요.”

지우 엄마는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내 말을 따라 계속 운전했다. 횡단보도 지나기 전에 보이는 빌라촌 골목으로 우회전. 옹벽을 끼고 경사진 골목을 둘러 가다 작은 교회 앞으로 다시 직진. 가로등이 드물게 지나갔고 깨진 아스팔트를 밟아 몇 차례 덜컹거렸다. 차는 후미진 주택가 앞에서 멈췄다. 전조등 불빛이 주택들 사이로 가파르게 이어진 계단을 비췄다. 빛이 닿지 않는 계단 위쪽엔 그림자가 졌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석현아, 다급하게 부르는 지우 엄마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랐다. 온몸이 그림자에 묻힐 때까지 걸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작아지고, 더는 들리지 않았다.

*

다음 날 담임을 찾아가려던 계획은 실행하지 못했다. 마음을 정하기 어려웠다. 심술이라기엔 유치해지는 기분이었고 분노라기엔 너무 거창했다. 어떤 다정함은 누군가를 철저히 배제하기도 했으며 그 앞에서 내가 세운 계획은 보잘것없어졌다.

지우 엄마 역시 학교에 오기로 했던 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더 지나 담임을 통해 나와 다른 반이 되는 조건으로 지우의 전학이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우 엄마의 요청이었다고 했다. 담임은 감색 재킷을 고쳐 입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제대로 된 협상은 아니었다. 양쪽에서 팽팽히 당기던 끈을 지우 엄마와 내가 동시에 놓아버렸으니까. 우리가 주도권을 포기한 순간 이익을 챙긴 건 교장과 담임뿐이었다.

지우의 전학일은 금방 다가왔다. 중간고사 일주일 전이었고 조례가 끝나자마자 잠이 덜 깬 애들은 책상 위에 엎드렸다. 담임이 교실을 나가려다 말고 내게 다가왔다.

“지금쯤이면 수학 선생님 반에서 지우 소개를 막 마쳤을 텐데. 오랜만에 인사도 할 겸 먼저 찾아가 보는 건 어때?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담임은 내 등을 두드리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처음 지우를 마주했을 때 수학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난처함과 호기심, 적대심이 뒤섞인 교실에서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지우를 상상했다. 얼굴을 바닥에 내리깔고 허공 어딘가를 보며 가장 뒷자리로 걸어갔겠지. 지우를 찾아간다면 어떤 분위기로 맞아주어야 하는 걸까.

교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고성과 웃음이 뒤섞이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잠시 후 복도 쪽 창문 밖으로 불쑥 솟은 얼굴이 나타났다. 다물지 않은 입에 목을 앞으로 쭉 뺀 채 먼 곳을 응시하는 눈. 창문 사이로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새 키가 더 자랐는지 주변 애들보다 얼굴 하나쯤은 더 위에 있었고 입술 위는 거뭇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문을 열었다. 석현아. 지우가 천천히 다가오며 굵어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엉거주춤 등을 굽혀 긴 팔로 나를 안았다. 우리를 둘러싼 애들이 낮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환호했다. 복도에서부터 따라온 애들과 반에 있던 애들이 뒤섞여 제법 큰 무리를 이뤘다. 서로에게 어떤 상황인지 묻기도, 가벼운 욕을 뱉기도 했다. 나를 안은 지우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왈칵 눈앞이 뜨겁게 흐려졌다.

“나는 네가 필요해.”

턱으로 내 왼쪽 날개뼈를 누르며 지우가 말했다. 지우의 옷에서 레몬 방향제 냄새가 났다. 잔잔한 향이 코 깊숙이 퍼지자 상냥한 목소리, 적절했던 차 안의 온도, 쇼핑백의 바스락거리던 소리가 차례로 떠올랐다. 눈앞이 다시 맑아졌다. 교실과 복도에 모인 애들 뒤로 팔짱을 낀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담임과 수학이 스쳤다. 흐뭇하게 웃는 담임 옆에서 수학은 꽤 감명받은 얼굴이었다. 가늠하기 어려웠던 마음을 이젠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수학을 의식하지 않은 척 눈을 감았다. 팔을 들어 지우를 안았다.

“응, 나도.”

눈물이 나도록 눈을 더 꾹 감았다.

글 쓰는 자체로 행복해지는 작가 되고 싶어


● 당선소감

박진호 씨
박진호 씨
소설 쓰기는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행위 같다고 종종 투덜거렸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즐거우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행복하게 몰입한 순간은 찰나였고 괴로움은 너무 길었다. 진심을 드러내기 쑥스러워 취미라는 말 뒤에 숨기도 해봤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무엇이든 써 내려가야만 하는 마음이었다. 누군가 내 것을 읽고 아무 말이라도 건네주길 바랐다.

내 첫 번째 독자이자 일 년 가까이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신 김엄지 선생님, 그리고 뜨거웠던 이번 여름 비대면 수업을 통해 뵈었던 서유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두 분을 통해 글 쓰는 마음가짐과 치열하게 몰두하는 즐거움을 배웠다.

동, 태이, 동원, 해기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네 사람과의 인연 덕분에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행동으로 옮기고 지속할 수 있었다. 내가 쓴 모든 습작들을 읽고 아낌없이 조언해 준 파이썬 원정대 선아와 하영, 오랜 친구 소영, 권오령 소장님에게 큰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더불어 윤원 소장님, 성환, 도기, 합평 수업을 통해 스쳐간 문우들. 글쓰기가 막막해질 때마다 여러분들이 해주었던 사려 깊은 말들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묵묵히 응원해 준 부모님, 이인애 님과 박재규 님에게 한없이 감사하다.

당선 소식을 들은 오후까지만 해도 무척 떨리고 기뻤지만 지금은 조금 무서워졌다. 요행으로 당선된 것은 아닐까.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내 소설이 끝까지 읽혔다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하고 또 무거울 따름이다.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린다. 서투른 부분까지 보듬어주었을 그 마음을 간직하며 오래도록 써 나가 보겠다. 기억되려 하기보단 글을 써서 행복할 수 있는 작가가 되겠다.

△1988년 서울 출생 △한양대 도시공학과 졸업, 서울대 협동과정 도시설계학 석사

감각적 문장, 힘있는 서사… 반전 통한 매서운 타격


● 심사평

성석제 씨(왼쪽)와 최윤 씨.
성석제 씨(왼쪽)와 최윤 씨.
예년과 달리 올해의 본심 진출작 13편에서는 생동하며 되살아나는 ‘새봄’의 느낌이 각별했다. 집중적으로 고려 대상이 된 작품은 네 편이었다.

‘회피 성향’은 젊고 재기가 있어 보인다. 유행도 느껴지고 일상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추세도 읽힌다. 그런 반면 문장에 부주의하거나 자의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저 말없이’는 차분하고 현실적이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소소한 유머, 페이소스 같은 감정의 파동이 인상적이다. 문장 또한 안정되어 있다. 다만 신인의 작품에서 기대되는 강력한 패기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아버지의 조선식 정원’에서는 치고 나가는 힘이 느껴졌다. 인생의 전환기에 고향에 내려온 딸이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며 정원에 몰두하는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는 글에는 과거, 전통과 현대, 현재를 아우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한 편의 단편소설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 ‘어떤 진심’은 단단하고 강렬하다. 적절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문장은 감각적이고 서사에는 시의성과 힘이 있다. 대학 입시를 위한 점수 따기의 전쟁터가 된 ‘세상 속 세상’ 학교와 우리 사회를 냉소적이고 위악적인 어조로 잘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작품 후반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을 통해 이 시대에 경종(警鐘)을 울리는 매서운 타격이 느껴진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다음으로 기회를 미루게 된 분들에게는 격려의 인사를 보낸다.

최윤·성석제 소설가

#신춘문예 100주년#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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