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으며 ‘나’는 그걸 부고가 아닌 SNS 추모 계정 표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말까지 거짓이라는 건 슬픈 일이다.
‘너’한테 진심이라는 게 있긴 있었니.
‘나’는 늘 좋아요, 만 누르던 ‘너’의 게시물에 첫 댓글을 남긴다.》
남아있는 사람 ‘나’는 두 달 전 서울에서 내려온 ‘너’의 연락을 받는다. 직전의 만남 때 별다른 말도 없었고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너’였기에 반가우면서도 그 연락이 낯설다. ‘근교 촌캉스’를 검색해서 밀양의 한 독채 펜션을 찾아낸 ‘나’는 ‘너’와 거기서 만나기로 한다. 밀양에서 만난 ‘너’는 그러나 지난번의 만남 때와 같이 묻는 말에 단답으로만 대답한다.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너’는 뇌진탕 증세를 겪고 있다고 말하며, ‘너’의 엄마가 며칠 전 옮긴 소파의 위치에 적응하지 못해 벽에 부딪쳤다는 이야기를 한다. 밀양에 도착한 ‘나’와 ‘너’는 펜션을 거닐며 대여섯 마리의 고양이들을 본다. 펜션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중 ‘너’가 ‘나’의 아들 이름인 동원을 동은으로 잘못 발음하는 것을 듣고, ‘나’는 잠시 예민해지지만 그걸 지적하지는 않는다. ‘나’는 자신의 예민함이 예술가적 기질이 아니라 일상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기질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나’와 함께 지역의 한 읍에 위치한 예고를 졸업했고 지역의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너’는 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이 지역에 남아서 전공과 무관한 법원 서기보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림책 작가로서의 일도 지역에서 조금씩 인정받으며 해나가고 있다. ‘나’가 육아와 직무에 적응하는 사이 ‘너’와의 연락은 점차 뜸해져 어느 날부터인가 SNS로만 서로의 근황을 아는 사이가 되었다. ‘너’는 메이저 출판사에서 시인으로 데뷔했고 ‘카제’라는 독립영화를 연출했다. ‘나’는 ‘너’의 시는 종종 보았으나 영화는 볼 수 없었다. ‘너’는 주목받는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다. 연락을 하지 않고 산 건 아니었으나 어느 날부터인가 연락은 점점 뜸해져서 길어질 법한 말의 자리는 이모티콘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미 인플루언서이며 ‘나’는 그런 ‘너’가 고등학교 때 알던 ‘너’가 맞는지,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너’의 게시물에 관성적으로 누르던 좋아요, 를 어느 날부터인가 누르지 않는다. ‘너’가 ‘나’가 알던 그 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너’와 ‘나’는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었고 다른 아이들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나’는 ‘너’와 함께 짧은 시를 공유했다. 우리가 만든 모임의 규칙은 셋이었다. 평가하지 않기, 감상하지 않기, 설명하지 않기.
“달팽이는 자웅동체라서 둘만 있으면 교미가 가능하대. 되게 편리한 신체 구조 아니가?”
“그래서?”
‘너’는 그 순간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이성애자였으므로 그때는 그게 미친 짓이었다.
처음 법원에 발령받았을 때 ‘나’는 민형과 한쪽의 창고에 주로 머물렀다. 그곳에는 과장 시험을 준비하는 계장들의 앙증맞은 독서실 책상이 있고 전날의 숙취로 힘든 직원들이 잠시 누워서 쉴 수 있는 간이침대가 있다. ‘나’는 그 어둠의 밀도가 좋아서 가끔 잠이 들곤 하는데 잠이 들면 반드시 악몽을 꿨다.
“거 있는 민형사계 장부 수천 권이 다 학대받은 사람, 치인 사람, 죽은 사람 증거 사진들 수두룩 빽빽이 첨부된 사건 기록 아이가. 그런데 가가 자면서 악몽을 안 꾸는 기 더 이상한 거 아이라?”
형사2계 계장은 그곳에서의 악몽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밀양에서 ‘너’와 ‘나’는 함께 고기를 구워 먹고 쉬면서 영화 ‘밀양’을 본다. 송시연이라는 배우 이야기를 나누던 ‘너’와 ‘나’는 당사자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거기서 둘의 의견이 갈리고, ‘너’는 ‘나’의 이야기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나’는 울컥해서 ‘너’에게 한마디한다. ‘너’는 채 다 못 본 ‘밀양’을 끈 다음 같은 감독의 영화 ‘시’를 재생한다.
다음 날 아침 ‘너’는 전날보다 머리가 훨씬 맑아졌다고 말한다. 함께 봄비를 보며 커피를 마시던 중 ‘나’는 문득 묻고 싶어진 게 생긴다.
“서울에서는 왜 내려오게 된 거고?”
“오래 참았네, 박지은.”
‘너’는 ‘나’가 자신의 삶에 일어난 좋은 일들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나’는 단지 임용, 결혼, 출산, 육아로 인해 바빴을 뿐이고 그게 ‘너’가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동원이를 계속 동은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둘은 그러나 금방 화해를 하고, 헤어진다.
밀양에서 돌아오고 몇 달 후 ‘나’는 남편의 노트북을 켠다. 남편은 무속이나 비방 등을 믿는 사람이어서 생활의 여러 면에 그런 것들을 적용한다. 노트북 화면 또한 풍수적으로 남편의 삶에 좋다는 일출이다. ‘나’는 남편의 아이디로 p2p 사이트에 접속해 ‘너’의 영화 ‘카제’를 검색해서 다운로드한다. ‘너’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으며 ‘나’는 그걸 부고가 아닌 SNS 추모 계정 표시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게 그날 뇌진탕의 후유증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그 황망한 죽음 앞에서 ‘나’는 ‘너’의 영화 ‘카제’를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영화 ‘카제’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열일곱 살 조선인 소년 가미카제였던 ‘정원’에 대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너’가 고등학교 때 써서 보내주었던 소설 ‘신, 추락하다’를 출력해서 읽는다. ‘너’가 한 대학 문예창작학과 현상공모에서 예심에 통과했던 소설이다. ‘나’는 그때 ‘너’의 소설이 지닌 진정성에 대해 의문과 반감을 느꼈다. 그러나 ‘너’를 좋아했던 시절이므로 하고 싶은 말들을 참았다. 영화 ‘카제’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일본어 유언은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실재하는 육성 녹음본이다. ‘나’는 그 부분을 듣고 ‘너’가 삼 년 전에 낸 시집에 있던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말까지 거짓이라는 건 슬픈 일이다.
이 문장은 ‘너’의 SNS 고정 게시글로 상단에 있다.
‘너’한테 진심이라는 게 있긴 있었니.
‘나’는 늘 좋아요, 만 누르던 ‘너’의 게시물에 첫 댓글을 남긴다.
밀양에 다녀와서 네가 서울로 올라가기 얼마 전 ‘나’와 ‘너’는 함께 다녔던 예술고등학교에서 만났었다. ‘너’는 이 지역에서의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며 ‘나’에게 계속 여기 살 것인지를 묻는다. ‘나’는 촌스럽다는 말이 지닌 이상한 함의에 대해 생각한다. 얼마 전 다섯 살 동원이 또래 엄마들과 만난 ‘나’는 이 지역 아이들이 미디어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현실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딸 엄마들이었다. 엄마들은 ‘나’가 아들 엄마여서 유대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암시하듯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너’는 빨리 떠나, 라고 말했다. 그때 떠난다는 말의 의미는 이 작은 도시가 아니라 이 세상을 뜻한 건 아니었을지, ‘나’는 뒤늦게 생각한다.
‘너’의 고정 게시글에 댓글을 단 뒤로 한창 악플이 달려서 ‘나’는 SNS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해 두었었다. ‘나’는 레스토랑 SNS 이벤트 때문에 몇 달 만에 비공계 계정을 푼다. 모르는 계정으로부터 디엠 하나가 와 있다.
―저는 돌아가신 이은지 감독에 대한 칼럼을 쓰고 있는 J&D페이퍼의 하서연이라고 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취재 요청을 드리고 싶은데 연락 가능하실 때 부탁드립니다.
디엠을 주고받은 끝에 ‘나’는 취재 요청을 거절한다. 법원은 최근 지역 철강회사의 노조 시위로 인해 많은 소송 건이 발생해 바쁘다. 점심시간에 민형과 창고 대신 법정에서 잠이 들던 ‘나’는 그로 인해 낮잠을 잘 공간을 잃어 피로하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너’에 대해 무심해지고 싶다.
그러나 서연은 어떻게 알았는지 법원까지 ‘나’를 찾아온다. 서연은 ‘나’에게 밀양 여행이 어땠는지 묻고는 자신이 밀양 태생임을 밝힌다. 서연은 어릴 적 자신의 오빠와 관련된 이슈로 인해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서울의 한 대학에 다니며 히키코모리처럼 살고 있었다. ‘너’는 그런 서연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준 사람으로서 영화 ‘카제’의 스태프로 참여하게 만든다. 서연은 그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화 제작사가 아니라 정의 구현을 위한 시민 연대 같은 곳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너’는 서연에게 서연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 ‘너’는 갑자기 서울을 떠나 내가 있는 지역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서연은 밀양에서 ‘너’와 내가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그 순간 ‘나’는 ‘너’에 대해 맹목적인 것처럼 보였던 서연이 사실은 ‘너’를 불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서연에게 말했다는 그 영화 이야기를 ‘너’와 나눴던 것처럼 에둘러 말한다. 서연의 불신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안심하던 찰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날 ‘너’와 나눴던 송시연 배우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 말한다. 그 순간 서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낀다.
얼마 후 포털사이트에서 ‘J&D페이퍼 하서연’을 검색한 ‘나’는 법원에 찾아온 사람이 하서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디엠을 보냈던 계정도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나’는 초겨울에 남편과 함께 ‘너’와 갔던 밀양의 독채 펜션을 다시 찾는다. 별들이 환히 보이는 밤하늘을 보며 ‘나’는 죽은 ‘너’의 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기에 더 보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나’는 별 사진 한 장을 ‘너’에게 보낸다.
낮에 이곳 밀양에 오면서 ‘나’는 동원이를 낳기 전 다녀온 블라디보스토크를 떠올렸다. 따스한 밀양의 풍경과 같이, 평화로운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양공원과 아르바트 거리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곳의 사람들 중 누군가는 지금쯤 전쟁에 참전해 있고 몇 사람쯤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혹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펜션을 마음에 들어한다. 그건 고양이들이 가득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귀신을 볼 줄 안대. 잠도 제일 좋은 명당에서만 잔다는데.”
저녁을 먹고 나와 작은 마루에 앉아 있자 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이들에게는 어쩌면 내 옆에 함께 있을지도 모를, 아니 내게 조금이라도 스며들어 있을지 모를 ‘너’가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달빛 속에서 ‘나’와 눈을 맞춘 채 고요히 정좌한 고양이의 눈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 눈동자 속에 네가 비칠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평생 좋은 소설 쓰는데 진심 다하며 기회 갚겠다
● 당선소감
최근 저는 남겨지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노란 등원 차량에 탄 아이를 향해 하염없이 손 하트를 보내는 사람. 서울로 가는 기차 밖에서 하염없이 손을 흔드는 사람. 공항에서 하염없이 긴 포옹을 하는 사람. 하염없이 우는 사람. 떠나는 사람에게 미지가 기다리고 있다면 남은 사람에게는 떠나는 사람의 빈자리와 그 빈자리를 둘러싼, 여전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일상을 부정하고, 견디고, 바꿔 나가고, 사랑하는 일. 그리고 익숙해지는 일. 저는 언제나 제가 쓴 소설이 그 빈자리 같아서 하염없이 바라보곤 합니다.
제 말에 언제나 귀 기울여 주는, 제 영원한 사랑과 믿음인 아내와 다섯 살이지만 또렷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하는 아이에게, 지금의 이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게 용기를 줘서 감사하다고 전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걱정으로 저를 키우신 포항의 어머니, 아버지, 늘 사위를 염려하고 글 쓰는 일로 바쁜 삶을 혜량해주시는 충주의 어머님, 아버님께 기쁜 소식 전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제 영원한 스승이신 김문주 교수님께 오래 못 드린 안부 인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동시의 길을 환히 밝혀주시고 살펴주시는 제 든든한 배후 이안 선생님 그리고 동시마중. 아이를 위해 기꺼이 마음 내어주는 동생네와 처제·처형네. 저희 가족의 안부에 마음 써주시고 다정한 이야기 건네주시는 김세경 선생님, 권도형 선생님. 마음씀이 늘 고마운 명재. 늘 따스한 인사를 건네주시는 오윤환 선생님, 김정애 선생님. 동시와 동시를 둘러싼 마음을 나눠주시는 이시원 선생님. 감사와 축복을 전합니다.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동아일보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평생 좋은 소설을 쓰는 데에 진심을 다하는 것으로, 주신 기회를 세상에 갚아 나가겠습니다. △1987년 경북 포항시 출생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숨기면서 드러내는 날렵한 기술 돋보여
● 심사평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제재 면에서 매우 다채로웠을 뿐만 아니라 수준도 고르게 높았다. 심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작품이 많아 좀처럼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될 때, 고민이 커지면서 기꺼운 마음도 따라 높아지기 마련이다.
‘파르티안 샷’은 한국인 여성이 화자이기는 하지만 작품 안에 몽골인 여성을 등장시켜 기마궁술인 파르티안 샷의 세부를 훨씬 사실성 있게 끌어올린다. 성적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의 해소가 파르티안 샷 방식의 보복은 물론 아닐지라도 시를 쓰고 낭송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을 거라는 암시는 어딘지 탐탁해 보이지 않는다.
‘우아한 짐승들’은 신화 속의 켄타우로스를 등장시켜 인간과 짐승의 욕망 경계를 흥미롭게 고찰할 뿐만 아니라 켄타우로스를 논현역에 출몰시킴으로써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지우는 데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게다가 다소 미심쩍기는 해도 ‘나’와 ‘효진’을 번갈아 오가는 분열적 시점을 택해 메타픽션적인 시도까지 보여주는 발칙한 매력의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선작인 ‘남아있는 사람’은 숨은 빛 ‘밀양(密陽)’을 이야기하는 작품답게 ‘이은지’라는 빛을 숨기면서 드러내는 솜씨가 이만저만 아니다. 마찬가지로 숨은 그늘이라 할 수 있는 ‘오빠 혹은 팔루스(phallus)’의 폭력도 가려둠으로써 오히려 더 또렷해지게 하는 날렵한 기술이 작가의 몸에 익은 듯하다.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된다.
상대적으로 점수가 높은 작품에 당선의 영예가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논의된 작품들 간의 점수 차가 미미했다는 점 다시 한 번 밝힌다. 그러기에 축하와 격려를 받을 모두가 설 곳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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