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출퇴근길 오며 가며 담배를 태우는 한 남자를 본 기억은 있다. 그뿐이다. 이름을 묻진 않았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와도 애써 외면해 왔다. 흉흉한 세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는 나와는 무관한 남이니까. 인파 속에서 만난다면 모르고 지나칠 딱 그 정도의 사이가 편했다.
내 얘기처럼 써놓았지만 실은 남의 얘기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2021년) 속 주인공 진아는 제 곁에 다가오려는 모든 이들과 애써 거리를 둔다. 두 귀엔 이어폰을 꽂고, 고개는 땅바닥을 향한 채 집 문밖을 나선다. 그 모습이 꼭 “내게 말 걸지 말라”는 암묵적인 신호 같다.
‘타인과 거리 두기’는 진아가 카드사 고객 상담원으로 늘 1등 실적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진아는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고객들의 말에 온 마음을 다하는 대신 ‘유체이탈’을 한다. “미래로 시간 이동하는 기술을 개발했다”라는 둥 “미래에서 쓸 수 있는 카드가 있냐”는 둥 헛소리를 내뱉는 고객에게 진아는 감정 한 톨 섞지 않고 이렇게 답한다. “네, 미래로 이동하는 기술을 개발하셨군요. 그런데 아직 미래에서 쓸 수 있는 카드는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고객님.”
그런데 1인분의 삶조차 버거워 애써 외면한 ‘옆집’의 존재가 자꾸만 거슬리기 시작한다. 옆집에서 새어 나오던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실은 옆집 남자가 죽어 부패한 데서 비롯된 냄새였단 걸 알게 된 뒤부터.
늘 지나쳐오던 것처럼 내 갈 길 가면 그뿐인데, 진아는 텅 비어 버린 옆집 앞에서 자꾸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어렴풋이 그 남자의 옆얼굴을 그려본다. 그러다 가물가물한 기억 끝에서, 어느 날엔가 옆집에서 ‘쿵’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던 새벽을 떠올린다. 옆집 남자는 그날 죽었을까. 그날의 ‘쿵’ 소리를 모르는 체하지 않았다면 살았을까.
부재함으로써 옆집의 존재가 드러난 그날 이후, 진아는 자꾸만 자기 너머의 세계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옆자리에 앉은 신입 상담원 수진이 눈에 띈다. 수진에게 쏟아지는 고객들의 폭언이 거슬린다. 그 폭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는 수진의 입술과 체념하는 두 눈을 바라본다.
수진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날부터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이라 애써 모른 척해보려 해도 앳된 그 얼굴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진아는 이제 헤드셋 너머 고객의 폭언에 더는 유체이탈로 응대할 수가 없다. 그토록 거리 두려 했던 ‘타인의 고통’이 진아에게 옮아서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타인이라는 세계가 열린 밤, 진아는 밤새 뒤척인다. 옆자리 수진의 안부가 궁금해서. 그가 무탈하길 바라는 마음이 내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더 커져서. ‘거리 두기’라는 삶의 철칙을 깨버리고 타인의 삶에 끼어든다. 고객들의 전화만 받아봤던 진아가 수진에게 전화를 건다. 휴대전화 너머 수진의 안부를 확인하곤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그간 못다 전한 진심을 터놓는다.
“근데 저 사실 혼자 밥 못 먹는 거 같아요. 혼자 잠도 못 자고, 버스도 못 타고, 혼자 담배도 못 피우고…. 사실 저 혼자 아무것도 못 해요. 그런 척하는 거예요.”
유치원생 때부터 “혼자서도 잘하기”를 교육받는 세상에서, ‘혼자로는 모자람’을 고백하는 다 큰 성인의 이 한마디가 내 마음을 관통한 이유는 뭘까.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그들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됐기 때문일까.
옆집 남자가 홀로 맞이한 죽음은 언젠가 내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옆자리 신입 직원이 겪은 폭언은 머지않아 내게도 닿게 될 일이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혼자 겪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사건이 들이닥쳤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건, 목격자이자 보호자인 타인이 내게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향하는 이 영화의 결말이 비단 영화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벌어진 무안공항의 합동분향소에는 새해 첫날부터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공항 안 카페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유가족과 봉사활동가들을 위해 ‘커피 200잔 선결제’를 해뒀다고 한다. 안유성 명장을 비롯한 셰프들은 유가족들에게 따듯한 전복죽 1000그릇을 대접했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지만 홀로 남겨진 슬픔을 알기에.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유족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한 일일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