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한국사의 모든 임금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칭호를 썼다. 그는 절대군주였으면서 종교적인 지도자까지 자처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온 세상의 구원자로 높여 부르도록 ‘미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궁예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궁예는 자신의 성공이 주술적인 이유 덕택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신라는 김(金)씨가 임금이고,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과거에는 금성(金城)이라고 불렀다. 이에 주술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신라가 금(金)의 기운, 쇠의 기운을 가진 나라라고 믿곤 했다.
그런데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쇠의 기운은 물의 기운으로 이어진다고 하므로, 궁예는 물의 기운을 이용해 신라를 넘어서는 운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궁예는 사람들이 연도를 부르는 방법, 즉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世)’라고 바꾸기까지 했다. 서기 911년을 수덕만세 1년이라고 불러서, 연도를 말할 때마다 ‘수덕만세’라는 주문 같은 말을 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궁예는 성공을 이어 나갈 수 있었을까. ‘고려사’에 따르면 궁예는 918년 왕건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뒤 산골짜기로 숨었고, 이틀 동안 도망치다가 부양이라는 지역에서 너무 배가 고파서 들판의 보리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그러다 동네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이 그의 최후다. 가장 높은 칭호를 사용한 사람이 가장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고 할 만한 사연이다.
대체 궁예는 왜 수덕만세 따위의 말을 자주 하면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빠졌던 것일까. 현대의 과학은 그 이유를 잘 밝혀 놓았다. 그런 이상한 믿음에 대해 해석한 책도 여럿 나와 있다. 그중에서도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 칼 세이건이 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다. 한 가지 이야기만 소개하면, 과학자들은 확증편향이라는 뇌의 인지 오류가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사람은 자신이 품은 생각이 옳다고 증명될 경우 좋아하고, 틀렸다고 하면 싫어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자기가 틀렸다는 증거가 보일 때는 억지 논리를 갖다 붙여서라도 무시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아마 궁예는 자신이 물가에서 신라 군사와 싸울 때 승리를 거뒀다거나,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신 뒤 전투에서 승리했던 경험이 몇 번 있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물의 기운으로 쇠의 기운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증명됐다고 여기면서 주술에 대한 믿음을 굳혔을 것이다. 물론 물가가 아닌 곳에서 싸우다가 승리한 적도 있고 물을 마시고 패배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엔 어떻게든 이유를 갖다 붙여 예외라고 무시했을 것이다.
이런 심리는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멍청한 사람이든 어느 정도는 갖고 있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과학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런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든 그 위험을 경계하며 다양한 관점의 의견을 듣고 자기 생각을 수정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재위 초 궁예의 장점에 대해 “그는 항상 재물을 공정하게 나누고, 싸움터에서는 병사들 곁에서 자면서 그 괴로움을 같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직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평범한 다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며 그때 조직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너무나 평범한 이치에 닿아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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