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쉬운 방법이 있다. 편 가르기 싸움이 한창일 때, 상대편에 서면 된다. 더 많은 욕을 먹고 싶다면? 처음엔 편을 들다가 나중에 다른 편으로 갈아타면 된다. 애당초 편들지 않는 사람도 미움을 받지만, 편을 바꾸는 사람은 더 따가운 눈총을 감수해야 한다. ‘괘씸죄’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편이 틀렸을 수도 있어. 이번엔 상대편이 옳아” 같은 말을 내뱉는 순간,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오늘날 사람들 마음속엔 저마다의 ‘절대 악(惡)’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악에 동조할 때 배신의 대가는 혹독하다. 이탈의 기미만 보여도, 아군 내에서 조리돌림당하는 ‘검은 양(Black Sheep)’으로 전락해 적군보다 더 혹독한 공격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둘러싼 국회의 풍경은 이런 배신의 서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당론에 따라 표결을 거부한 의원들, 가결 이후 찬성파를 색출하자는 갈등까지, 충성의 가치를 시험대에 올린 정치판의 민낯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보수가 충성을 도덕의 기반으로 삼고 배신을 죄악시한다고 설명한다. 굳이 그의 연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진영을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배신의 대가를 누구보다 잘 학습한 이들이다. 충성의 검증 무대에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최악의 수는 자기 편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우물쭈물하다간 어느 쪽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지지 기반을 송두리째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집단이 자기 편의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지지층의 이탈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편을 공격하고 악마화하면 된다. 이는 곧 자기 집단을 과도하게 이상화하고 상대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집단적 나르시시즘(Collective Narcissism)’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바로 그 심리다.
편 가르기 사회에서, 국정 현안마다 입장을 바꿔 ‘2찍’에서 ‘1찍’으로, 혹은 그 반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고운 소리를 듣기 어렵다. 박쥐, 철새, 기회주의자 같은 비아냥을 감수해야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시즌2에서조차 ○, × 선택의 기로에서 편을 바꾸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가 그나마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편만 옳다는 확신에 갇히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신념을 돌아보는 ‘샤이 부동층(浮動層)’이 더 많기 때문이라 믿는다. 내 편이 잘못했을 때 과감히 뒤통수 칠 줄 아는 이들이 정권 교체를 이뤄내고, 반복되는 위정자들의 독선과 불통의 정치를 견제해 왔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남을 비난하고 자신을 방어한다. 상대편을 공격하고 내 편을 옹호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계엄 사태를 언급하며 민주주의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 각자가 자신과 다르게 보이거나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보이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말했다.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한국에서 다시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개인과 집단의 나르시시즘이 초래한 계엄 같은 비극적 사태를 ‘자기에 대한 과신’, ‘자기 편에 대한 과신’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관용의 부족은 또 다른 관용의 부족을 낳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어렵게 만든다
구조적으로 편 먹기를 피할 수 없는 정치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이 욕을 먹는 이유도 결국 이 두 가지로 압축될 것이다. 편을 들어서, 혹은 편을 들지 않아서. 편향적이라는 비판도 많지만, 그보다 더한 맹비난은 편을 이탈할 때 쏟아진다. 이 때문에 편향적 매체가 상대적으로 생존에 유리하고, 모든 진영을 비판하는 매체는 ‘모두까기’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집단적 나르시시스트들의 선동에 휘둘리지 않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려면 국민도, 언론도 때때로 편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양비론자는 종종 비겁하다 손가락질당하지만, 난세에는 양비론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편을 정하는 순간, 내 편의 치부에는 눈을 감고 상대편의 잘못에는 쉽게 분노하게 된다. 내 편을 비판하면 ‘가짜 뉴스’고, 상대편을 비판하면 ‘정의 구현’이다. 하지만 내가 신뢰하는 이의 말에도 반쪽짜리 거짓이 숨어 있을 수 있고, 내가 경멸하는 이의 말에도 반쪽짜리 진실이 담겨 있을 수 있다. 관용을 실천하려면 먼저 나 자신을 의심하고 돌아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비단 정치가 아니라도 세상은 끊임없이 “너는 ○냐 ×냐”고 묻는다. 확신을 공유하지 않으면 아마도 주변에 적이 늘어날 것이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확신보다는 배신이 낫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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