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콘도에 ‘꽃비’가 주륵주륵…마술적 사실주의 살려낸 영상미[선넘는 콘텐츠]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9일 17시 08분


드라마 ‘백년의 고독’-원작 소설 비교

드라마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콜롬비아의 작은 마을 ‘마콘도’. 하늘에서 수천 개의 노란 꽃들이 천천히 내려온다. 거리는 노란 꽃들로 가득 찬다. 사람들의 발이 푹 잠기 정도로 거리엔 꽃이 쌓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노란 꽃에 파묻힌 채 마을 설립자 ‘부엔디아’의 장례식을 치른다.

지난해 12월 11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백년의 고독’ 파트1은 유명한 ‘꽃비’ 장례식 장면에서 화면 가득 진짜 노란 꽃 수천 송이를 채웠다. “거리가 폭신폭신한 요를 깔아 놓은 것처럼” 꽃비가 내렸다는 원작 소설을 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또 소설은 “장례 행렬이 지나갈 수 있도록 사람들이 꽃을 삽과 갈퀴로 치웠다”고 묘사했지만, 드라마는 노란 꽃 위로 행렬이 그대로 지나가는 모습으로 바꿔 보여준다. 원작 소설이 지닌 ‘마술적 사실주의’(현실과 사실을 뒤섞는 문학 기법)를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이다.

드라마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 노란꽃 바닥에 채우고, 카메라 응시로 긴 문장 살려내

드라마는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가 1967년 발표한 동명의 원작 장편소설이 지닌 마술적 사실주의를 살려내기 위해 컴퓨터그래픽(CG)를 최소화했다. 상상의 도시 마콘도를 표현하기 위해 거대한 들판에 진짜 도시를 지었다. 실제로 나무에 둥지를 틀고, 개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마을을 만든 것. 또 비행기 격납고 안에 부엔디아의 집을 만들었다. 격납고 천장에 조명을 달아 빛과 어둠이 수시로 바뀌며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부엔디아의 집을 표현했다.

드라마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기묘한 현상을 재현하기 위해선 ‘응시’를 택했다. 예를 들어 부엔디아의 첫째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침실에서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 나와 뱀처럼 나무 바닥, 흙길을 지나 어머니 ‘우르술라’에게 부고 소식을 알리는 장면을 약 40초간 카메라로 조용히 따라갔다. 소설 속에서 한 줄기 피가 15개의 장소를 지나는 장면을 약 420자의 긴 문장으로 표현한 마르케스의 호흡을 카메라로 그린 것이다.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 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가, 울퉁불퉁한 보도를 통해 계속해서 똑바로 가서 …(중략)…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달걀 서른여섯 개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부엌에 나타났다.”

드라마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마콘도 사람들이 처음 ‘얼음’을 보는 순간은 드라마에서 얼음에 자연광이 반사되도록 비춰 신비로움을 강조했다. 소설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로 표현된 얼음을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강조해 마치 종교적인 경험을 느꼈던 마콘도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소설 속 ‘유령’도 보통 드라마처럼 반투명한 CG로 표현하지 않았다. 이 유령은 부엔디아가 젊은 시절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결투 끝에 죽인 옛 마을 사람이다. 드라마에선 배우가 피를 철철 흘리는 분장을 한 채 졸졸 따라다닌다. 그 덕에 살인의 끔찍함을 효과적으로 자아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 동아일보DB
가브리엘 마르케스. 동아일보DB

생전 마르케스는 이 작품 영상화에 반대했다. 자신이 그려낸 마술적 사실주의를 제대로 구현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마르케스가 세상 떠난 후 10여 년이 지나 유족은 영상화에 동의했다. 콜롬비아 배우들이 다수 참여하고, 영화가 아닌 16부작 드라마로 만들어 방대한 서사를 담겠다는 약속 때문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넷플릭스가 ‘나르코스’와 ‘로마’와 같은 히트작으로 남미 콘텐츠의 세계적 매력을 입증한 이후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소설을 대규모로 각색하겠다고 (유족에게) 제안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백년의 고독 표지. 민음사 제공
백년의 고독 표지. 민음사 제공


● 한강 문학도 ‘마술적 리얼리즘’?

‘마술적 사실주의’는 흔히 남미 문학의 특성이라 불린다. 하지만 최근 서양 비평가들 사이에선 한국 문학 역시 마술적 사실주의로 읽히곤 한다.

특히 영국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최근 3년 연속 한국 작품을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로 선정할 때마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단어를 썼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2022년 최종 후보 정보라 단편소설집 ‘저주토끼’에 대해 “마술적 사실주의, 호러, 공상과학(SF)의 경계를 초월했다”고 했다. 2023년 최종 후보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에 대해 “마술적 사실주의로 단순한 사건에 숨겨진 의미를 부여한다”는 해외 평론을 인용했다. 지난해 최종 후보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에 대해서도 “현대 산업 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마술적 현실주의”라는 해외 평가를 덧붙였다.

2024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2024년 10월 17일 오후 서울 삼성동 포니정홀에서 열린 ‘2024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 역시 ‘마술적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한강 작가의 부친인 한승원 작가는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은 ‘리얼리즘’ 세대와 그 아래 세대인 ‘환상적 리얼리즘’ 세대를 구분한다. ‘백년의 고독’을 필두로 한 남미 문학에 한강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승원 작가는 지난해 10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한강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크게 문학은) 영미 문화권하고 남미 문화권하고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남미 문화권은 ‘돈키호테’로 대변되고 영미 문화권은 ‘햄릿’으로 대변돼요. 그런데 1980년대 무렵에 남미 문화권의 ‘백년의 고독’이라는 ‘환상적 리얼리즘’이 쓰인 소설이 들어오면서 젊은 소설가들이 반성을 해요. …(중략)… 한강이 소속돼 있는 ‘4세대 문학인’들의 문학 자세가 말하자면 ‘환상적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느냐, 신화적인 맛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중략)… 신화적인 요소, ‘환상적 리얼리즘’의 요소로 한강이라는 작가는 굉장히 문학을 더 아름답게 쓴 거예요.”

실제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 엔 모두 유령이 등장한다. 마르케스가 서구의 침략을 받은 남미의 비극적 역사를 ‘마술적 사실주의’로 풀어냈듯, 한강 역시 한국 사회의 슬픔을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풀어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최초, 아시아 여성 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6일(현지시간) 스톡홀름 스웨덴 아카데미(스웨덴 한림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12.6/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백년의 고독#마콘도#마술적 사실주의#넷플릭스#마르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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